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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간다는 것.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읽을 때 마다 또 하나의 감정이 쌓여져 간다. 일본 소설을 좋아 하거나 세계문학을 좋아하는 이들 중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그는 천엔짜리 지폐에 주인공이 되었던 사람이다. 너무도 유명해 한가득 기대를 안고 읽었던 그의 작품은 생각과 달리 달콤쌉싸름한 초콜렛을 입에 한가득 물고 있는 것 같았다. 달콤한 맛을 기대한 것과 달리 그의 작품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입안 가득 '쌉싸름한 맛이 입안 가득 베어 들었다. 마치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집을 처음 읽는 것처럼 대단하고 대단해서 눈에 띄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었던 나에게 그 어떤 힘도 없이 끌려가 남의 집 살이를 하던 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 역시 우물 안에 가둬진 인물을 표현해 내거나 나쓰메 소세키가 그린 인물들이 그와 같이 위궤양을 앓으며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이나 이웃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커다란 붓으로 그려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쓰메 소세키가 직접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각 인물에 투영해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들이 자신 혹은 나쓰메 소세키의 지인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깊이 닮아있다. 너무나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려내다 보니 그의 책은 자칫 속도감이 붙지 않아 지루함이 느껴지지만 한 권의 책을 덮고 나면 비로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가 세밀하게 그려내는 만큼 독자 또한 천천히 그의 책을 읽다보면 비로소 나쓰메 소세키의 던지는 물음들이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른다.
그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먼저 읽었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진가를 느끼게 해 준 책은 단연 <행인>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속도감이 있는 것은 물론 나쓰메 소세키가 던져주는 물음들이 너무나 기이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고뇌와 번민이 쌓여가는지를 행인의 주인공인 이치로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지로'지만 그의 형인 이치로를 통해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 세밀하게 바라본다. 나쓰메 소세키는 어떤 인물을 등장 시켜도 두 사람이 부부라 할지라도 그들의 관계를 근접해서 글을 썼다. 등장하는 인물의 생김새는 물론 성격,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쓰여졌지만 보이지 않는 미묘함이 곳곳에 드러난다. 이치로의 날카롭지만 예민한 기질이 부인인 나오를 의심하게 되고, 동생인 지로에게 나오의 정절에 대해 의심하며 지로로 하여금 나오를 시험해 달라는 부탁에 지로는 단번에 거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수 나오와 지로가 폭풍우로 인해 한 방에 있게되고 이치로는 더욱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할 까 싶을 정도로 이치로의 불안한 내면을 잘 드러낸다. 막장 드라마 같은 소재로 쓰일 법한 이야기가 나쓰메 소세키의 필치를 통해 보여지는 인간 내면에 드리우는 불안과 복잡한 내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후반부에는 편지글을 통해 이치로가 의심하는 자기를 반성하고 불성실했던 나를 돌아보며 자기의 약점을 알아가지만 존재의 불안함,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불확실성이 여실히 드러내며 소설이 끝이난다.
그 어떤 소설보다 <행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재밌었지만 이치로가 고민하고 절망에 휩싸였던 그 감정이 너무나 깊이 있게 느껴져 부인의 정절을 의심하는 남편의 모습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고민하고 느끼는 고독과 절망에 쌓여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또 한꺼풀 더 심층적으로 보여지는 내면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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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남의 마음을 알 수 있어" 하고 불쑥 물었다. - p.136
"어떤 서간에서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했어. 나는 여자의 용모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여자의 몸에 만족하는 사람을 봐도 부럽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의 영혼, 이른바 정신(spirit)을 얻지 못하면 만족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해도 내게는 연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메러디스라는 남자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어요?"
"그런 건 몰라. 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하지만 지로, 내가 영혼, 이른바 정신도 얻지 못한 여자와 결혼한 일만은 분명하지." - p.138
" 형님한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무척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남의 마음 같은 건 아무리 학문을 한다고 해도, 연구를 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님은 저보다 뛰어난 학자니까 물론 그걸 알고 있겠지만,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이라고 해도, 형제라고 해도 마음과 마음은 그냥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고 실제로 상대와 자신의 몸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마음도 떨어져 있는 거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아닐까요? - p.139
형은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누워 있었다. 몸이 누워 있다기보다는 정말이지 정신이 누워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리고 그렇게 누워 있는 정신을 그 흐물흐물한 구렁이가 비스듬히 머리에서 발끝까지 휘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상상에서 그 구렁이는 때때로 따뜻해지기도 하고 차가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휘감은 것이 변할 때마다, 그리고 휘감은 강도가 변할 때마다 달라졌다. - p.198
"난 내아이만 다룰 줄 모르는 게 아니야. 아버지나 어머니를 다루는 기술도 없어. 그건 고사하고 제일 중요한 내 아내조차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거든. 이 나이가 되도록 학문을 한 탓에 그런 기교를 배울 틈이 없었지. 지로, 어떤 기교는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 같더라." - p.207
나쓰메 소세키는 서른여덟 살이 돼서야 첫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그 후 지병이었던 위궤양 악화로 사망하기 전 10여 년 동안 열다섯 편의 중장편소설을 비롯해 단편소설, 에세이 등을 남겼다. 그가 일본의 국민 작가,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100여 년전에 남긴 그 글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같은, 정신적이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타자를 타자로 온전히 인정하는 것, 가족과 사회 속에서 개인을 온전한 '자아'로 인정하는 그 모순적 방법과 해결은 근대와 현대, 서양과 동양,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라는 이분법으로는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 p.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