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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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을 둘러싼 권력 게임!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피어스 브라운이 그린 <레드 라이징>은 제목만큼이나 책에서 그려진 이야기들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느껴져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 책 어디에선가 본 장면들이 자꾸만 겹치다 보니 그가 그리는 세계가 지구 밖 행성 중 하나라 할지라도 전혀 거리낌 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화성에 사는 가장 최하위급인 노예인 대로우와 그의 아내 이오. 가장 최하층 계급인 '레드'인 그들이 겪는 실상은 우리의 현실과 직결되는 것처럼 배고픔에 허덕인다. 여자아이들은 14살에 결혼을 시키지만 대로우와 함께 하기 위해 배급을 적게 받으며 기다렸다가 16살 결혼이 가능한 시점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위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한 시절도 잠시 이오는 대로우의 아버지가 죽었던 방식 그대로 처참하게 죽었고, 대로우는 자신들의 눈을 가로막고 있었던 진실을 꿰뚫으며 지배층인 '골드'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를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꾸고 '골드'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노력을 감행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모습 전부만 바꾸는 것이 아닌 그가 가지고 태어난 피 조차도 바꾸고 바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 과정을 하나하나씩 겪어 나가는 그의 모습이 대단하다 싶기도 하지만 작가가 그린 세계관과 그들을 향해 비상하는 대로우의 모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본 장면들이기도 하다. 하위층 계급의 여자가 고위층 남자를 만나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는 모습은 한 때 여자들이 꿈꾸는 이상향일 정도로 위를 올라가려는 갈망을 옷을 갈아입고 쇼핑하는 장면으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대로우의 선택 조차도 거기서 한발짝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바꾸었으나 이름과 생각만은 바꾸지 못한 대로우의 희생은 그가 바라고자 하는 '골드'의 위치까지 올라 피마르게 살아가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라 긴장감이 넘치지만 동시에 여러모로 아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계급을 들러싼 권력 게임은 태고적부터 시작된 게임이다. 로마시대 때에도 권력 게임은 시작되었고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계급은 어디서나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더 이 책이 상상력으로 똘똘뭉친 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미 그 세계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대로우가 우뚝 선 방법이 시간이 많이 지나도 그 방법 밖에는 선택 할 수 없으며 앞으로 그가 걸어가는 방향이 어떻게 바뀔지는 이후의 이야기를 통해 깊이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처음 펼쳤을 때 가장 첫 페이지를 펴자마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지 않았다."라는 한 줄이 이 책의 가장 큰 주제이자 사람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투쟁하고 열렬히 원하는 그 무엇을 대로우를 통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전략적 틀을 파괴해 자신이 스스로 가두어 놓은 틀 안에서 사람들 스스로가 깨닫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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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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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간다는 것.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읽을 때 마다 또 하나의 감정이 쌓여져 간다. 일본 소설을 좋아 하거나 세계문학을 좋아하는 이들 중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그는 천엔짜리 지폐에 주인공이 되었던 사람이다. 너무도 유명해 한가득 기대를 안고 읽었던 그의 작품은 생각과 달리 달콤쌉싸름한 초콜렛을 입에 한가득 물고 있는 것 같았다. 달콤한 맛을 기대한 것과 달리 그의 작품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입안 가득 '쌉싸름한 맛이 입안 가득 베어 들었다. 마치 도쿠가와 이에야스 전집을 처음 읽는 것처럼 대단하고 대단해서 눈에 띄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었던 나에게 그 어떤 힘도 없이 끌려가 남의 집 살이를 하던 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 역시 우물 안에 가둬진 인물을 표현해 내거나 나쓰메 소세키가 그린 인물들이 그와 같이 위궤양을 앓으며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이나 이웃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커다란 붓으로 그려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쓰메 소세키가 직접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각 인물에 투영해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행동들이 자신 혹은 나쓰메 소세키의 지인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깊이 닮아있다. 너무나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려내다 보니 그의 책은 자칫 속도감이 붙지 않아 지루함이 느껴지지만 한 권의 책을 덮고 나면 비로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가 세밀하게 그려내는 만큼 독자 또한 천천히 그의 책을 읽다보면 비로소 나쓰메 소세키의 던지는 물음들이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른다.

그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먼저 읽었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진가를 느끼게 해 준 책은 단연 <행인>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속도감이 있는 것은 물론 나쓰메 소세키가 던져주는 물음들이 너무나 기이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고뇌와 번민이 쌓여가는지를 행인의 주인공인 이치로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지로'지만 그의 형인 이치로를 통해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 세밀하게 바라본다. 나쓰메 소세키는 어떤 인물을 등장 시켜도 두 사람이 부부라 할지라도 그들의 관계를 근접해서 글을 썼다. 등장하는 인물의 생김새는 물론 성격, 태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쓰여졌지만 보이지 않는 미묘함이 곳곳에 드러난다. 이치로의 날카롭지만 예민한 기질이 부인인 나오를 의심하게 되고, 동생인 지로에게 나오의 정절에 대해 의심하며 지로로 하여금 나오를 시험해 달라는 부탁에 지로는 단번에 거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수 나오와 지로가 폭풍우로 인해 한 방에 있게되고 이치로는 더욱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 이야기는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할 까 싶을 정도로 이치로의 불안한 내면을 잘 드러낸다. 막장 드라마 같은 소재로 쓰일 법한 이야기가 나쓰메 소세키의 필치를 통해 보여지는 인간 내면에 드리우는 불안과 복잡한 내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후반부에는 편지글을 통해 이치로가 의심하는 자기를 반성하고 불성실했던 나를 돌아보며 자기의 약점을 알아가지만 존재의 불안함,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불확실성이 여실히 드러내며 소설이 끝이난다.

그 어떤 소설보다 <행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재밌었지만 이치로가 고민하고 절망에 휩싸였던 그 감정이 너무나 깊이 있게 느껴져 부인의 정절을 의심하는 남편의 모습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고민하고 느끼는 고독과 절망에 쌓여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또 한꺼풀 더 심층적으로 보여지는 내면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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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남의 마음을 알 수 있어" 하고 불쑥 물었다. - p.136


"어떤 서간에서 그 사람은 이런 말을 했어. 나는 여자의 용모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여자의 몸에 만족하는 사람을 봐도 부럽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의 영혼, 이른바 정신(spirit)을 얻지 못하면 만족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해도 내게는 연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메러디스라는 남자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어요?"

"그런 건 몰라. 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하지만 지로, 내가 영혼, 이른바 정신도 얻지 못한 여자와 결혼한 일만은 분명하지." - p.138


" 형님한테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무척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남의 마음 같은 건 아무리 학문을 한다고 해도, 연구를 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님은 저보다 뛰어난 학자니까 물론 그걸 알고 있겠지만,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이라고 해도, 형제라고 해도 마음과 마음은 그냥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고 실제로 상대와 자신의 몸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마음도 떨어져 있는 거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일 아닐까요? - p.139


형은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누워 있었다. 몸이 누워 있다기보다는 정말이지 정신이 누워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리고 그렇게 누워 있는 정신을 그 흐물흐물한 구렁이가 비스듬히 머리에서 발끝까지 휘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상상에서 그 구렁이는 때때로 따뜻해지기도 하고 차가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휘감은 것이 변할 때마다, 그리고 휘감은 강도가 변할 때마다 달라졌다. - p.198


"난 내아이만 다룰 줄 모르는 게 아니야. 아버지나 어머니를 다루는 기술도 없어. 그건 고사하고 제일 중요한 내 아내조차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거든. 이 나이가 되도록 학문을 한 탓에 그런 기교를 배울 틈이 없었지. 지로, 어떤 기교는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것 같더라." - p.207


나쓰메 소세키는 서른여덟 살이 돼서야 첫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그 후 지병이었던 위궤양 악화로 사망하기 전 10여 년 동안 열다섯 편의 중장편소설을 비롯해 단편소설, 에세이 등을 남겼다. 그가 일본의 국민 작가,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100여 년전에 남긴 그 글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같은, 정신적이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타자를 타자로 온전히 인정하는 것, 가족과 사회 속에서 개인을 온전한 '자아'로 인정하는 그 모순적 방법과 해결은 근대와 현대, 서양과 동양,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라는 이분법으로는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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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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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밀도 높은 소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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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1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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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보다 더 농밀하고 치밀하게 권력의 고삐를 쥐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무더운 여름날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인 <로마의 일인자>가 출간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재밌게 책을 읽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목소리가 너무나 깊이 스며들어 있어서 객관적으로 로마 역사를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느껴지곤 했었는데 콜린 매컬로가 쓴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각 인물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권력의 가장 큰 꼭대기에 이르기 위해 올라서는 과정들이 그려져 있다. <로마의 일인자>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꾸고 정략결혼을 통해 입지를 다져가는 과정이라면 <풀잎관>은 입지를 다져 놓은 곳에 자신의 입지를 더 견고하게 탑을 쌓아가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풀잎관>에서 마리우스와 루푸스의 나이는 이미 예순 살이 되었고 술라 역시 마흔두 살의 중후한 매력이 물씬 나오는 남자로 성장했다. 이전에 만났던 마리우스가 조금 더 유연한 사고를 지닌 남자였다면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에는 조급한 성격과 자신이 옮다고 생각한 것들은 절대 굽히지 않는 옹고집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직한 면모가 있고,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마리우스는 자신의 길을 평탄하게 가는 것 같다. 그런 반면 술라는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매이기 보다는 자유로운 성정을 갖고 있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율릴라와의 결혼으로 입지를 다져 놓았지만 여전히 남자들에게는 신임을 못받는 인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이 많지만 많은 여자들과의 염문은 그로 하여금 여자에 대해 치를 떨만큼 증오한다. 술라라는 인물은 선과 악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의미로 정의할 수 없기에 계속해서 눈을 떼지 않고 살펴보고 싶다.


로마의 일인자가 연정을 담은 봄이라면, 풀잎관은 냉정하고도 차가운 겨울이다. <풀잎관>에서도 역시 남녀간의 사랑을 담고 있지만 부적절한 사랑이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봄이지만 누군가에는 사무치는 겨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권력의 고삐를 쥔 사내에게는 여자들이 가정을 돌보고 자신들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살고 있는 재산이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 박혀 있다. 특히 풀잎관에서 더 시리도록 그런 인격인들이 많이 나와있어 눈을 찌푸리게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가이우스의 욕망은 끝이 없었고, 아내의 조카인 카이사르가 영민하다는 이야기에 누군가가 이야기 해 주었던 예언이 마음 속에 파고 들었던 것처럼 나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간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를 시기하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공간을 떠나 여전히 인간의 이기심은 변치 않음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우스와 술라, 루푸스의 이야기와 리비아와 드루수스의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기본이 되지 않고 돈이나 권력의 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정략 결혼의 폐해를 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관계에 대한 중요성 보다 보다 더 치밀하고 간교해진 가운데 자신이 가진 입지의 구축과 혈통이 깨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앞으로의 로마를 어떻게 바꿔나갈지를 알려주고 있다.

***

 

​"그렇지. 그리고 원로원의 저 멍청한 작자들이 제대하는 최하층민 병사들에게 땅뙈기를 나눠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해서야. 마리우스, 최하층민은 아무런 돈도 재산도 없다는 걸 절대 잊지 말거라! 나는 최하층민에게 우리 군에 입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럼으로써 이전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시민 계급이라는 새로운 피를 로마에 수혈해주었어. 그렇게 모인 최하층민 병사들은 누미디아에서, 아콰이 섹스티아이에서, 베르켈라이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단다. 재산을 가진 기존 군인들보다 더 잘 싸우면 잘 싸웠지 결코 못하지 않았어. 그런데도 이들이 재대하고서 다시 로마의 빈민굴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땅을 갖고 정착하게 해주어야 해. 이탈리아 내 로마 공유지에 최하층민 병사들을 정착시키겠다고 하면 1계급과 2계급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새로 시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이런 곳에다 그들을 정착시킬 법을 제정한거란다. 그들이 여기에 정착했다면 우리 속주들이 로마화되고, 그렇게 때가 무르익으면 우리로마의 동조세력이 늘었을 테데. 불행히도 원로원과 기사계급의 지도층 인사들은 로마가 무엇과도 섞일 수 없는 븍한 곳이라 생각하고 로마의 관습과 생활양식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것을 원치 않는단 말이지." - p.74


 

"불행히도 이런 아이들이 항상 그 가능성에 부응하지는 못한다는 말이지. 재능의 불꽃이 어릴 때 너무 밝게 타오르다가 나이가 들면 점점 시들어 꺼져버리거나, 지나친 확신과 자만심에 빠져 있다가 순식간에 추락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오. 하지만 어쩌다 한 명씩은 대단히 유용한 인물이 되지. 이렇게 유용한 이들은 커다란 보물이라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늘 그 부모들을 도와주는 것이오."  - p.84​


"너는 어린 카이사르가 갖는 중요한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반드시 이 아이가 걸출한 이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온힘을 다해야 한다. 이 아이가 아니면 다른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목적의식을 불어넣어주거라. 모스 마이오룸을 보존하고 옛 전통과 오랜 혈통의 기세를 되살리도록 말이다. " -p.93


손에 든 물건은 얼마나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이제는 머릿속에 단 한 가지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가 가진 건 분노뿐이었다. 아니면, 그건 고통이었을까? 큰 슬픔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크나큰 외로움이었을까? 그는 활활 타는 불길에서 따뜻함을 지나 서늘하게 식었고 마침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제야 이 끔찍한 불능을, 필연이자 위안을 주는 살인에 그토록 매혹되어 있는 자신이 같은 귀족 신분의 여자들에게는 도저히 그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 p.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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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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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의 기억은 슬픔도 즐거움도 아련한 추억으로


 내 인생의 책이라고 명명하기는 부끄럽지만 정말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면 단번에 꼽는 책이 꼽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바로 이도우 작가가 쓴 <사서함 110호 우편물>이다. 예전에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태영이(김정은씨) 보고 또 봐도 몇 번을 봐도 좋아해 '구간반복'을 하면서까지 본다던 감동의 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기주(박신양씨)에게 고백하는 장면처럼 나 또한 <사서함 110호 우편물>이 나에게 그런 책이다. 보고 또 봐도 너무나 좋은 그런 책. 진솔이와 건이의 사랑이야기를 보며 몽글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할 만큼 사랑스러운 소설이었다면, <잠옷을 입으렴>은 둘녕의 유년시절과 현재를교차해서 쓴 성장소설이다. 한 소녀가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세밀하게 그려져 있지만 둘녕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즐거움 보다는 슬픔과 외로움이 비어져 나온다.

보통 아이들이 겪는 유년시절의 추억과 다르게 둘녕은 엄마의 부재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열한 살 소녀가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외갓집로 들어간다. 그로써 아버지와의 인연도 흐릿해지고 홀로 외갓집에 들어가 이모 내외와 막내이모, 막내 삼촌, 외할머니 그리고 이종사촌인 수안과 함께 살아간다. 바람을 막아주고 햇살을 비춰줄 부모의 부재와 외갓집에서 살아가는 둘녕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서걱거린다. 무엇을 해도 불안하고 불완전한 상태로 비춰진다. 마치 물에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 마냥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을 사람들은 이방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과 다른 무언가가 둘녕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반대로 이모의 딸인 수안은 둘녕과 다른 성품을 가졌고 문학소녀로서 이야기를 짓고,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보다 더 깊은 세계에 빠져들었던 소녀였다. 

모암마을에 살면서 느꼈던 그 시절의 향수는 아릿하고, 아프게 다가오지만 한 편으로는 서른 여덟의 둘녕에게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시절이기도 하다. 그때를 떠올리면 동갑내기인 수안과 어울려 다니며 함께 울고 웃었던 추억 너머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사건과 사고로 인해 두 소녀의 마음이 많이 아팠고, 멍들어갔다. 외할머니의 부엌과 문갑 사이에서 나온 약들의 익숙한 이름과 향내가 깊이 파고들즈음 한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 풋풋한 첫사랑으로 둘녕과 충하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지만 수안과 승모의 사랑은 그렇지 못했다. 스카우트 활동을 위해 야영을 함께 갔던 날 두 소년 소녀의 만남은 서로를 향한 마음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폭우로 인해 승모가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둘녕과 수안의 마음은 각기 전환점을 맞는다.

아마도 수안의 인생에서 승모의 죽음은 너무나 큰 생채기였고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 이후 수안의 감정폭은 너무나 큰 격차를 보이며 불완전했고, 둘녕은 외가에 얹혀살면서 겪은 이모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가족의 무관심을 묵묵히 이겨내며 살았다. 살고싶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가족아닌 가족으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 그들과 이별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늘 염두해 살고 있다. 서로의 처지와 사정이 다르다 보니 수안과 둘녕의 우정은 너무나 각별하고 특별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엄연하게 그들을 가로막는 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 그것을 수안은 눈치채지 못했고, 둘녕은 말 없이 그저 속에서야 삭혀야 했던 그 마음이 책 사이사이에 비춰져 보는 이로 하여금 둘녕의 텅 빈 마음이 가슴 속에 콕 하고 박힌다.

<잠옷을 입으렴>을 읽으면서 둘녕과 같은 유년시절을 보냈던 친척언니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둘녕과 같으면서도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즐비했다는 것을 현재의 둘녕의 나이즈음에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해가는 것이 그 어떤 성장통 없이 자라날 수 없겠지만 부모의 부재로 인한 외가의 삶은 늘 가시방석이었던 것을 둘녕의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의 고조없이 끈을 놓아버린 둘녕의 사랑이 너무나 가여웠고, 관계를 이어나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 조차 버렸던 둘녕에게 충하와의 만남이 한줄기 빛으로 희망어린 관계를 예고하며 이야기가 끝이났다.


개인적으로 결말의 아쉬움이 있지만 유년시절의 기억은 그녀에게 살아야 할 희망도 절망도 가져다 주었기에 가슴 속 깊이 묻어 버리고 오롯하게 나만의 행복을 위해 둘녕이 씩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을 때 될 수 있으면 주인공의 감정이 이입되지 않게 객관적으로 읽어내려 했지만 <잠옷을 입으렴>은 도무지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난다. 아마도 너무나 담담하고 비워냈던 소녀의 이야기가 가슴 속에 콕 하고 박혔나보다.


***


돌이켜보면 세상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양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 하나가 많이 행복하면 다른 하나가 그만큼 불행할지도 모른다고. 타인의 행복이 커진다고 해서 내 행복이 줄어들진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렸다. - p.50


그리고 수안이의 아편은, 그 아이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두려웠습니다.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함께할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올 것 같았습니다. 그때가 되면 수안이는 나를 놓지 않아도 내가 아이를 놓을 것 같았습니다. 아가위나무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요. - p.66


어린 존재를 사로잡은 우상은, 그러나 어느날 그들의 세계로 우리가 한 발짝 걸어 들어갈 때면 새삼 긴장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이해해주던 마음은 상대가 선을 넘는 걸 깨닫는 순간 경고음을 보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의 깊은 곳을 엿본 기분일 때, 우리는 실망했고 배신감을 느끼며 약간씩 상처를 받았다. - p.244


"생각해보니 둘녕이 너야말로 풍향계 같은 사람이야. 내세우지 않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넌 어딜 가든 잘 살꺼야.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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