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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년시절의 기억은 슬픔도 즐거움도 아련한 추억으로
내 인생의 책이라고 명명하기는 부끄럽지만 정말 좋아하는 책을 꼽으라면 단번에 꼽는 책이 꼽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바로 이도우 작가가 쓴 <사서함 110호 우편물>이다. 예전에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태영이(김정은씨) 보고 또 봐도 몇 번을 봐도 좋아해 '구간반복'을 하면서까지 본다던 감동의 영화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기주(박신양씨)에게 고백하는 장면처럼 나 또한 <사서함 110호 우편물>이 나에게 그런 책이다. 보고 또 봐도 너무나 좋은 그런 책. 진솔이와 건이의 사랑이야기를 보며 몽글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할 만큼 사랑스러운 소설이었다면, <잠옷을 입으렴>은 둘녕의 유년시절과 현재를교차해서 쓴 성장소설이다. 한 소녀가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 세밀하게 그려져 있지만 둘녕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즐거움 보다는 슬픔과 외로움이 비어져 나온다.
보통 아이들이 겪는 유년시절의 추억과 다르게 둘녕은 엄마의 부재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열한 살 소녀가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외갓집로 들어간다. 그로써 아버지와의 인연도 흐릿해지고 홀로 외갓집에 들어가 이모 내외와 막내이모, 막내 삼촌, 외할머니 그리고 이종사촌인 수안과 함께 살아간다. 바람을 막아주고 햇살을 비춰줄 부모의 부재와 외갓집에서 살아가는 둘녕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서걱거린다. 무엇을 해도 불안하고 불완전한 상태로 비춰진다. 마치 물에 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 마냥 그들과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것을 사람들은 이방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과 다른 무언가가 둘녕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반대로 이모의 딸인 수안은 둘녕과 다른 성품을 가졌고 문학소녀로서 이야기를 짓고,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보다 더 깊은 세계에 빠져들었던 소녀였다.
모암마을에 살면서 느꼈던 그 시절의 향수는 아릿하고, 아프게 다가오지만 한 편으로는 서른 여덟의 둘녕에게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시절이기도 하다. 그때를 떠올리면 동갑내기인 수안과 어울려 다니며 함께 울고 웃었던 추억 너머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사건과 사고로 인해 두 소녀의 마음이 많이 아팠고, 멍들어갔다. 외할머니의 부엌과 문갑 사이에서 나온 약들의 익숙한 이름과 향내가 깊이 파고들즈음 한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 풋풋한 첫사랑으로 둘녕과 충하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지만 수안과 승모의 사랑은 그렇지 못했다. 스카우트 활동을 위해 야영을 함께 갔던 날 두 소년 소녀의 만남은 서로를 향한 마음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폭우로 인해 승모가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둘녕과 수안의 마음은 각기 전환점을 맞는다.
아마도 수안의 인생에서 승모의 죽음은 너무나 큰 생채기였고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 이후 수안의 감정폭은 너무나 큰 격차를 보이며 불완전했고, 둘녕은 외가에 얹혀살면서 겪은 이모의 날카로운 눈초리와 가족의 무관심을 묵묵히 이겨내며 살았다. 살고싶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가족아닌 가족으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 그들과 이별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늘 염두해 살고 있다. 서로의 처지와 사정이 다르다 보니 수안과 둘녕의 우정은 너무나 각별하고 특별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엄연하게 그들을 가로막는 선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 그것을 수안은 눈치채지 못했고, 둘녕은 말 없이 그저 속에서야 삭혀야 했던 그 마음이 책 사이사이에 비춰져 보는 이로 하여금 둘녕의 텅 빈 마음이 가슴 속에 콕 하고 박힌다.
<잠옷을 입으렴>을 읽으면서 둘녕과 같은 유년시절을 보냈던 친척언니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엄마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둘녕과 같으면서도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즐비했다는 것을 현재의 둘녕의 나이즈음에서야 이해 할 수 있었다.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해가는 것이 그 어떤 성장통 없이 자라날 수 없겠지만 부모의 부재로 인한 외가의 삶은 늘 가시방석이었던 것을 둘녕의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의 고조없이 끈을 놓아버린 둘녕의 사랑이 너무나 가여웠고, 관계를 이어나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 조차 버렸던 둘녕에게 충하와의 만남이 한줄기 빛으로 희망어린 관계를 예고하며 이야기가 끝이났다.
개인적으로 결말의 아쉬움이 있지만 유년시절의 기억은 그녀에게 살아야 할 희망도 절망도 가져다 주었기에 가슴 속 깊이 묻어 버리고 오롯하게 나만의 행복을 위해 둘녕이 씩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을 때 될 수 있으면 주인공의 감정이 이입되지 않게 객관적으로 읽어내려 했지만 <잠옷을 입으렴>은 도무지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난다. 아마도 너무나 담담하고 비워냈던 소녀의 이야기가 가슴 속에 콕 하고 박혔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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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세상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양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 하나가 많이 행복하면 다른 하나가 그만큼 불행할지도 모른다고. 타인의 행복이 커진다고 해서 내 행복이 줄어들진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렸다. - p.50
그리고 수안이의 아편은, 그 아이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두려웠습니다.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함께할 수 있을지. 내가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가 올 것 같았습니다. 그때가 되면 수안이는 나를 놓지 않아도 내가 아이를 놓을 것 같았습니다. 아가위나무는 그런 내 마음을 알았을까요. - p.66
어린 존재를 사로잡은 우상은, 그러나 어느날 그들의 세계로 우리가 한 발짝 걸어 들어갈 때면 새삼 긴장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이해해주던 마음은 상대가 선을 넘는 걸 깨닫는 순간 경고음을 보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의 깊은 곳을 엿본 기분일 때, 우리는 실망했고 배신감을 느끼며 약간씩 상처를 받았다. - p.244
"생각해보니 둘녕이 너야말로 풍향계 같은 사람이야. 내세우지 않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넌 어딜 가든 잘 살꺼야. -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