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공주 난 책읽기가 좋아
다이애나 콜즈 글, 로스 아스키스 그림, 공경희 옮김 / 비룡소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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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07 세 가지 꿈으로



《영리한 공주》

다이애나 콜즈 글

공경희 옮김

비룡소

2002.4.24.



《영리한 공주》는 동화책이다. 책을 많이 읽는 글벗이 읽어 보라고 했다. 거듭 소리내어 읽으면 글쓰기 실마리를 새삼 알아차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책을 장만하던 2021년 7월 20일을 떠올린다. 그날은 마음이 어수선했다. 어디 가야 하는 날인데, 어디 가는 길에 반쯤 지나서 보니 가방이 없더라. 그냥 이대로 갈까 하다가 차를 돌려 집으로 왔다. 가방을 찾아야겠더라. 더구나 이날부터 우리 가게에서 일하는 분이 휴가를 간다고 하면서 쉬는데, 이분 자리를 채울 일꾼을 미처 찾지 못 했다. 모자라는 일손 걱정에, 집안일 눈치에, 또 제대휴가를 나온다는 아들내미 생각에, 또 나중에 사위가 될 ‘작은딸 남자친구’하고 밥 한 끼 먹기로 한 일에,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줄거리를 죽 짚어 본다. 아버지인 임금님은 보석만 좋아한다. 딸인 공주가 태어났지만 딸하고 놀 틈을 안 낸다. 아이는 엄마를 일찍 여의었고 아버지가 있는데, 어버이는 어버이로서 아이를 바라보지 않는다. 게다가 임금이란 사람은, 딸이 나이가 어느 만큼 차면 ‘목돈을 받고 시집을 보낼 마음’일 뿐이라, 아이가 뭘 읽고 쓰고 배우지 않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아이는 어버이 손길을 받지 못했지만, 돌봄이(시녀)가 곁에서 돌보고 이끌어 주었다. 글을 읽고 쓸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바느질을 익히고, 살림을 하나하나 배운다.


책을 덮고서 우리 어버이를 떠올린다.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는 학교를 얼마나 다닐 수 있었을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머니하고 아버지를 어떻게 가르쳤을까?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는 일이란 무엇이고, 어버이라면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야 할까?


《영리한 공주》에 나오는 아이는, 임금님인 아버지가 저를 돌보지 않고 쳐다보지 않더라도 미워하지 않는다. 보석을 받고서 엉뚱한 데에 시집을 보내도 미움이 아니라, 스스로 새길을 열려고 온마음을 기울인다. 아이는 ‘세 가지 꿈(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말에, 보금자리를 정갈하게 치우는 살림길 하나를 바라고, 손수 바느질을 해서 옷살림을 가꾸는 둘을 바라고,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그림을 담아서 둘레에 환하게 웃음꽃을 피우는 셋을 바란다.


누가 나한테 ‘세 가지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물어보면, 나는 어떤 세 가지를 바랄까? 더 많은 돈일까? 글을 써서 얻을 이름일까?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낼 수 있는 튼튼한 몸에서 넘치는 힘일까? 나는 이 책 《영리한 공주》에 나오는 아이처럼, 먼저 스스로 보금자리를 돌보고, 살림을 짓고, 생각을 펴면서 노래하는 꿈을 고르면서 밝힐 수 있을까?


어둠을 걷어낸 아이는 말을 타고서 새롭게 배우려는 길에 나선다고 한다. 돈(여행경비)을 챙긴다든지, 짐(여행에 쓸 물품)을 꾸리지 않는다. 그저 가볍게 말에 맨몸으로 타고서 호젓하게 길을 나선다.


크고 날이 잘 드는 칼이 있어야 괴물이나 적군을 물리치면서 나를 지킬 수 있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아버지인 임금님처럼 돈이 철철 넘쳐나더라도 스스로 즐겁게 하루를 누리지 않는 줄 일찌감치 알아보았다는 뜻이리라. 여기에 스스로 하루를 그리고 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글그림으로 펴는 손길이 함께 있구나.



2023.07.30.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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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
발터 벤야민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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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06 딱딱하다

 

일방통행로

발터 벤야민 글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4.30.

 

 

둘레에서 일방통행로는 꼭 읽을 책으로 꼽기에 장만했다. 지지난달에 처음 읽으면서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더라. 오늘 다시 펼쳐도 글이나 이야기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읽다가 자꾸만 멈춘다. 옮긴 말씨까지 한몫 거들듯 딱딱하다.

 

글쓴이 발터 벤야민을 풀이한 글을 들춘다. 꽤 길고, 이분이 뭘 하고 뭘 생각해서 뭘 썼다는 뜻인지 종잡기 어렵다. 논문을 써서 냈더니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라는 소리를 들었다는데, 절로 고개를 끄떡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번역 탓도 크다고 느낀다.

 

집안일을 하고서 다시 읽어 본다. 글은 꼭지 하나마다 짧다. 다음 글하고 이어가는 글이 아닌, 저마다 따로 노는 글이다. 글이름과 줄거리가 잘 와닿지 않는다. 글이름을 건너뛰고서 읽자니 오히려 줄거리를 어림할 수 있겠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분은 이렇게 한자로 얘기했을까? 어쩌면 라틴말을 많이 썼을는지 모르지만, 왜 옮긴이는 우리말로 생각을 풀어내려 하지 않을까? 딱딱한 글이고, 깔끔하지도 않다. 자꾸만 전쟁이 떠오른다. 책을 반쯤 읽다가 샛길로 빠진다. 드디어 책을 덮고 영화를 본다. 숨을 돌린다.

 

그런데 영화 하나를 다 보고서 책을 이어 읽으려고 펼쳤다가 또 덮는다. 골이 아파서 다른 영화를 본다.

 

에라 모르겠다. 읽다 만 책은 다음날 읽자고 생각한다. 오늘은 영화를 보자. 열두 시가 넘고 새벽 세 시가 넘어도 영화는 안 끝난다. 아홉째 이야기까지 보고 나니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이제 마지막 같은데 잠이 쏟아진다. 세 시간 자고 일어나 열째 이야기를 보니 열두째 이야기까지 흐른다. 마침내 다 보았다. 여덟 시간을 본 셈이다.

 

영화를 다 보고서 얼음을 먹는다. 다시 책을 펴서 꾸역꾸역 넘어가니 얼핏 실마리가 잡힌다. 글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이야기가 문득문득 나온다. ‘벽보부착금지라는 글은 퍽 마음에 닿는다. 한창 쓰는 글을 보여주지 말고 같은 시간 같은 종이 같은 펜으로 쓰라거나, 떠오르는 어떠한 생각도 모르게 지나가지 말고 적어 놓고서 펜에 자석을 붙이라는 말을 한다. ‘이야기()는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쓰기(문자)는 생각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조금은 와닿는다.

 

끝줄까지 읽었다. 이제 참말로 덮는다. ‘일방통행로라는 책이름처럼 글쓴이는 홀로 한쪽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우길 줄 아는 글 같다. 가만히 바라보는 그림을 헤아려 본다. 내가 글 한 줄을 쓴다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둘레를 보듯이 쓸 일이 아니다. 나는 내가 보는 눈으로 글을 쓸 일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걸어온 길을 되새기면, 내 눈으로 내 하루를 쓰는 글보다는, 자꾸 다른 사람 눈길로 둘레를 보려는 마음이 짙었구나 싶다.

 

훌륭하거나 뛰어난 분들이 쓴 글을 따라가듯이 쓰더라도 내 글이 될 수 없다. 내 눈길이나 마음이 어리숙하더라도, 스스로 가만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동안, 나 스스로 오래오래 보는 동안, 스스로 알아차리거나 배울 수 있다. 딱딱한 책을 다 읽고서 다짐한다. “나는 자랑하듯 쓰지 말아야지. 나는 말을 하듯이 써야지.”

 

2023.07.29.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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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9
기 드 모파상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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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05 나는 오직 나

 

여자의 일생

모파상 글

송면 옮김 

어문각

1986.07.31.


 

달과 6펜스읽고서 제자리에 꽂다가, 곁에 있는여자의 일생을 집었다. 우리 집에 있는 여자의 일생은 1986년에 나온 판이니 묵은 책이다. 그런데 첫 쪽을 넘기다가 깜짝 놀랐다. ‘1986학년도 2학기 중간고사 성적 우수라고 선생님이 적은 글씨가 있고, ‘도장이 찍혔다.

 

, 내가 열아홉 살 적에 받은 책이잖아! 여태 몰랐다. 이제야 알아본다. 놀란 나머지 책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뒤쪽 빈종이에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라는 김남조 시인이 쓴 시를 옮겼다. “고독에서 고고로라는 열여섯 줄도 적어 놓았다.

 

어쩐지 낯간지럽다. 마흔아홉 살이나 쉰아홉 살도 아닌,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무슨 고독을 씹는다고 했을까. 무슨 빗물 같은 정을 준다는 시를 읽었을까. 그러나 그때에는 둘레에서 다들 이런 시를 읽었고, 이야기했고, 학교에서도 배웠다.

 

우리 집에는 여자의 일생이 두 가지 책으로 있다. 하나는 민음사에서 펴낸 세계문학전집이다. 새책으로 장만했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 적에 받은 문고판이다. 이제 해묵은 책이다. 둘을 나란히 펼치면서 어느 책이 읽기에 쉽거나 잘 그렸을까 하고 한 줄씩 견주어 본다. 한글판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글결이 딱딱하다. 1986년에 나온 묵은 책이 부드럽게 읽힌다.

 

줄거리를 헤아려 본다. 잔느는 아버지 뜻에 따라 줄리앙을 만나 한 달 보름 만에 짝을 맺어서 나폴레옹 고향인 코르시카로 꽃마실을 간다. 꿈을 껴안으면서 살고 싶던 잔느는 첫날밤부터 꿈이 후멀어진다. 사납게 몸을 노리는 짝을 보면서 끔찍할 뿐이다. 더구나 짝은 하녀와 눈이 맞았다. 눈이 오는 날 죽으려고 했지만 아기를 밴 줄 알았다. 삶에 버림받고 숨이 넘어갈 듯한 마음을 처음 느끼면서 이제는 아이한테 매달린다. 그러나 이러고 나서도 끔찍하거나 괴롭거나 고단한 일만 잇따른다. 애써 돌본 아이는 노닥거리면서 갖가지 말썽만 일으킨다. 책이름이 여자의 일생인데, 여자로 살아가는 길이란 이토록 괴롭고 끔찍할 뿐인가. 무엇보다도 이런 줄거리를 담은 책을 왜 성적 우수 여고생 상품으로 주었을까? 지난날 학교는 여성과 남성을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

 

여자의 일생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닌가 봐요.” 같은 말을 들려주면서 맺는데, 글쓴이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이 보낸 삶을 글로 옮겼다는데, 이 나라와 사회와 학교는 우리한테 그저 현모양처되기만을 바라고, 모든 말썽과 티끌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라고 억누리려는 마음이지 않았나 싶다.

 

1986년에 학교에서 받은 여자의 일생을 옮긴 사람은 아마 시골에서 자란 분이라고 생각한다. 먼나라 시골빛을 잘 옮겨냈다고 본다. 그리고 모파상이라는 사람을 새삼스레 바라본다. ‘남성이 억지스럽고 사납게 만든 굴레를 낱낱이 그려낸 셈 아닌가. 어머니가 겪고 아버지가 보여준 모습에다가 동생이 살아간 길을 고스란히 옮겼으니 참 대단하다.

 

서른일곱 해 동안 우리 집 책시렁에 꽂힌 채 먼지만 먹던 책을 이제야 쓰다듬었다. 고등학생이던 1986년에는 현모양처라는 말이 꽤 멋지다고 여긴 적도 있지만, 여성도 남성도 현모현부도 아닌 사람으로 만나서 사랑을 참답게 찾을 수 있을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딸아들한테 골고루 조그맣게 울타리로 살고는 싶지만, 현모양처는 아닌, 그저 어머니로서 나로서, 이따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다.


2023. 07. 27.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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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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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04 달과 일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글

송무 옮김

민음사

2000.6.20

 

 

달과 6펜스는 2020.12.18 구미에 있는 삼일문고에서 샀다. 그날 세계문학전집을 한 꾸러미로 삼백스무 자락을 장만했다. 하루에 하나씩 읽으면 한 해 걸리고, 이틀에 하나 읽으면 두 해가 걸리리라 여겼다. 이 마음으로 읽으면 세 해쯤 넉넉잡아서 다 읽을 줄 알았다. 이제 여섯 달이 지나면 세 해째에 이르는데, 여태 펼치지 못한 책이 더 많다.

 

달과 6펜스는 2021.1.7에 첫 쪽을 넘겼다.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도 틈틈이 책을 읽을 생각에 즐거웠다. 그렇지만 이내 이 마음이 훅 꺼져버렸다. 이날은 저녁에 가게 다른 일꾼이 바코드가 있는 자리를 손으로 잡고는 여러 번 찍는 척하더라. 그러니까, 가게 물건을 마치 팔린 듯 찍찍 긁는 시늉을 하면서 빼돌린 셈이다.

 

다른 일꾼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 시시티비를 열 번쯤 돌려보았다. 그냥 넘어갈 수 없기에, 이이한테서 이야기를 들으려고, 이튿날 가게에 십 분쯤 일찍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십 분 일찍 나오면 제 시간만 버리잖아요. 그렇게 일찍 나갈 수 없으니 할 말 있으면 바로 하세요. 혹시, 제가 그거 먹은 일로 그러십니까?”

 

그거 먹은 일이라니, 아니 도둑질을 해놓고서 오히려 큰소리를 하네. 이이는 손전화 쪽글로 단순한 실수라고 얼버무렸다. 쪽글을 보고서 한참 할 말을 잊었다. 나는 대구 한켠에서 마을가게(마트)를 꾸린다. 혼자 가게를 볼 수 없기에 다른 일꾼을 시간제로 쓴다. 그래서 이 일꾼이 나가면 혼자 하루 내내 가게에 있어야 할 판이라서, 도둑질을 했어도 눈을 감아 주고서, 제발 제발 새마음으로 착하게 일하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빈 날이다.

 

그러고 보면, 달과 6펜스가 영 읽히지 않는데다가, 가게 일꾼이 도둑질을 하고도 오히려 큰소리를 하기에 도무지 책을 펼 마음이 아니었다. 한숨을 폭 쉬다가, 우리 집 책꽂이에 있는, 다른 달과 6펜스를 집었다. 민음사 판이 아닌 묵은 달과 6펜스는 시누가 예전에 읽은 낡은 책이다. 시댁 시골집에 있던 책을 가져왔는데, 오래된 달과 6펜스에는 한자가 많이 섞여 더 읽기 어렵다.

 

아무래도 이 책은 몇 해를 묵히고 나서야 읽을 수 있을 듯싶다. 그래도 줄거리라도 어림해 볼까 싶어, 책끝에 붙은 해설을 편다.

 

달과 6펜스는 화가 고갱 이야기를 풀었다고 한다. 그렇구나. 그런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책이름을 처음 보았을 적에는, 어떤 달 이야기가 나올까, 6펜스는 달하고 어떻게 얽히려나, 무슨 뜻일까 싶어 궁금했다. 초승달에서 보름달을 지나 그믐달이 되는 마음이 흐르려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6펜스라고 하는 영국 돈에 얽힌 이야기도 아니고, 글에는 달 이야기도 딱히 나오지 않는 듯 싶어, 책이름하고 고갱이라는 사람 이야기는 너무 멀리 떨어진 듯하다고 느낀다.

 

고갱이라는 사람은 그림이 뭐가 그리 좋았을까. 오직 그림 하나를 그리려고 집을 버리고 떠난 매무새가 의젓하거나 대견하다고 여길 만한가. 자꾸자꾸 더 멀리 외딴섬으로 옮기면서 그림을 남겼다는데, 무엇을 종이에 남기고 싶었을까. 다른(사회) 데에는 눈을 두지 않고서, 스스로 짓고 이루어서 펴고픈 뜻을 바라보기에 삶이 보람차거나 즐거울 만할까. (사회)이 어떻게 보든 아랑곳하지 않을 적에 예술을 꽃피울 수 있는 셈일까.  

 

(가정)을 버리고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들 얼마나 즐거울까 하고 돌아본다. 이렇게 바라보는 내가 꼰대 같은 아줌마 마음일는지 모르겠다. 하나를 가지려고 하면 둘을 잃어야 하는, 아니 버려야만 홀가분하기에 마음껏 넘나들면서 우리 삶 모두를 그림에든 글에든 바칠 수 있다면, 나로서는 참 어려운 길이다.

 

언제부터인가 글을 보면 서술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소설은 더더욱 서술어가 멈춘 글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낱말로 작은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쓰면 잘 읽힐 듯하다. 첫 장부터 설명하는 글이 턱턱 막혔다. 그나마 달과 6펜스는 사람 얼굴이 어떠한가를 가장 잘 들려주었지 싶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이야기를 편 책인데, 막상 이 글로는 그림을 그리는 삶을 잘 느끼기 어려웠다. 영어가 아닌, 한글로 옮긴 책을 읽은 탓일까.

 

책이름이 얼마나 크게 차지하는지 알 듯하다. 책마다 시집마다 책이름이나 글이름을 멋을 부려서 꾸미려고 하는 마음도 알 듯하다.

 

그런데, 해와 비와 바람과 숲과 들에 널린 풀꽃나무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글은 어쩐지 참 메마르다. 영어로 나온 글도 이랬을까. 글을 옮긴 사람 말씨가 녹아서 그럴까. 바람에 풀잎이 한들거리는 말을, 해가 하는 말을, 꽃이 하는 말을, 우리도 마음으로 받아적을 수 있을 텐데. 무딘 칼날로 종이를 잘라 엮은 책보다 더 아쉽다.

 



2023.07.27.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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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 지식생태학자 유영만 교수가 들려주는 나무에게 배우는 지혜
유영만 지음 / 나무생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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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03 나무처럼 서기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유영만 글

나무생각

2017.11.28.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2021.12.17.에 처음 장만했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그날 하루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얼굴도 안 씻고 마냥 책을 읽었다. 그날은 화담 서경덕 소설 두 자락도 슥 읽었다.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를 읽을 적에, 보랏빛과 노란 띠종이를 붙여 가면서 읽었다. 몇 군데나 띠종이를 붙였나 나중에 세니 스물세 군데이다. 오늘 한 해하고 일곱 달 만에 다시 읽으면서 책 귀퉁이를 접기로 한다. 예전에 읽을 적하고 얼마나 마음이 맞으려나 하고 헤아려 본다.

 

그런데 귀퉁이를 접은 데는 열로 줄었다. 더구나 예전에 띠종이를 붙인 곳하고 겹치면서 마음에 드는 대목은 딱 한 군데이다. 이 하나에는, 스님이 두드리는 나무방울(목탁)을 살구나무로 짠다는 이야기가 흐른다.

 

책을 덮고서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열아홉 달 만에 마음에 닿는 대목이 확 줄어들까. 더구나, 예전에 읽을 적하고 오늘 되읽을 적에 마음이 닿는 대목이 한 군데뿐일 수 있을까?

 

다시 책을 편다. 이 책을 쓴 분은 시집을 읽는 분 같다. 니체, 이성복, 김훈, 논어, 카슨, 신용목, 기형도, 베토벤, 김수영을 데려와서 여러모로 빗대는 이야기를 펴기도 한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열아홉 달 앞서만 해도 이름난 글지기(작가)’가 쓴 글이라면 덮어놓고 훌륭하다고 여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 뒤로 오늘이라고 해서 이 버릇이 다 사라졌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예전처럼 글지기 이름값(지명도)’만으로 책을 사거나 빌리지는 않는다.

 

이제 나는 내 하루를 글로 쓰는 길을 걸으려고 하다 보니, ‘아무리 훌륭하다고 여기는 글이라 하더라도, 책에 이렇게 자꾸 따오려 하면 눈도 마음도 안 간다. 좀 못나거나 투박하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이 스스로 누리고 겪은 하루를 적을 일이라고 본다.

 

이름난 여러 사람들 글을 데려오면 우리가 쓴 글이나 책이 더욱 돋보일까? 오히려 우리 글을 죽이는 굴레는 아닐까.

 

그러나 나부터 뉘우친다. 나도 그야말로 얼마 앞서까지 글이름이 높은 분들 글을 외우거나 누리집(블로그)에 올려야 나 또한 멋스럽거나 높아 보인다고 여기곤 했다.

 

우리 집은 아파트 육 층이다. 비바람이 칠 적에 창밖을 보면 나무 꼭대기가 보인다. 나무가 더위나 추위를 견디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잘 버티어낼까 걱정스럽곤 하다.

 

아무튼, 이 책을 쓴 분은 배롱나무를 놓고서 글을 쓸 적에 처음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적더라. 이런 글을 다시 읽다가, 글쓴이가 이 책에 다루는 나무를 숲에서 자라는 나무로 만나보기는 했을까 궁금했다. 지식으로 그러모아서 아는 척하면서 여러 글지기 글을 따오는 책을 슥 써내지는 않았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되읽고 나서 한 가지 꿈을 마음에 품는다. 나무를 떠올리는 일인데, 내가 스스로 나무가 되는 일이다. 옷을 훌훌 털어낸, 발가벗은 몸으로, 나무처럼 벌판이나 숲에 가만히 바람을 맞으면서 자란다고 생각해 본다. 나무처럼 맨몸으로 숲에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는지 꿈꾸어 본다.

 



2023.07.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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