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우는 소리
[푸른하루 3] 노루
벼꽃이 피었습니다. 들판이 푸릅니다. 고구마가 밭을 덮고, 길가 풀은 허리춤까지 올라옵니다. 능금나무에 썩은 능금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이웃 아저씨는 이레마다 능금밭에 약을 칩니다. 병든 능금과 고추에 약을 치고 길에 핀 풀도 죽입니다. 고추는 반은 익고 반은 희나리가 되어 말라갑니다.
이른아침 길에서 고라니를 만났습니다. 나도 놀라고 고라니도 놀랐습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고라니가 도랑을 풀쩍 뛰어 고추밭으로 들어가 산자락으로 달아났습니다.
봄에는 집 뒤 참나무 밑에서도 고라니를 보았습니다. 내가 낸 오솔길에는 짐승 발자국이 늘 있습니다. 마당에서 훠이 소리를 지르면 고라니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고 뒷산을 휘돌아 무덤 너머로 올라갑니다. 가랑잎이 사락사락 흔들려 노루가 걸어가는 그림이 훤히 보입니다. 어미일까 아기일까 짝일까. 먹을것도 마땅찮은 숲으로 가랑잎에 몸을 누이고 햇볕을 쬐며 졸까요.
해질 무렵이면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우하하하, 우웨액 꿰에액.
싸우는 소리인지 사랑을 부르는 소리인지 새끼를 찾는 소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을사람한테 물으니 밖에 나간 새끼를 부르는 소리라고 합니다.
“집이 여기야. 이리 와.”
나는 밤마다 새된 소리를 들으며 고라니 보금자리를 들킬까 걱정스럽습니다. 한 번은 나도 노루처럼 크게 소리를 질러 봅니다. 내 목소리에 내가 놀라고 귀가 먹먹합니다. 한동안 조용하던 고라니가 다시 웁니다. 소리가 다르다는 듯합니다. 왕겨 창고 쪽으로 걸어가니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고라니가 보입니다. 사람 사는 곳을 내려다보며 낮잠을 잤는지 눈이 마주쳐도 달아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흥 하자 그제야 우리 집 골짜기를 떠나갑니다. 그 뒤로 아랫집 쪽에서 고라니 울음소리가 납니다. 마을사람들은 고라니를 쫓을 뿐, 잡지 않습니다. 잡으면 다른 고라니가 또 오니까요.
어린 날에 노루를 본 적 있습니다. 송아지만 한 노루가 앞발 뒷발을 묶인 채 아궁이가 있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살아서 움직였습니다. 얼마나 떨었을까요. 노루를 잡으면 재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뒤 아버지가 아팠고 오빠도 다쳤습니다. 숲 어디선가 어린 노루를 바라보았을 어미 노루 생각이 오래 남았습니다.
박곡마을에서 매실을 따던 날에는 탈탈이 소리에 놀란 새끼 노루가 풀밭에서 튀어나오기도 했습니다. 울타리 밖 숲에는 어미 노루가 있었습니다. 어미는 컥컥 소리를 내며 새끼를 부르면서도 사람 때문에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새끼를 보고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어미를 보다가, 노루는 사람한테 들키면 그만 헤어지고 마는구나 싶었습니다.
새벽마다 마당 언덕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벼락비가 내린 어느 새벽에 고라니 한마리가 도랑에서 뛰어올라 눈앞을 휙 지나 비닐집 사이로 다리를 휘청이며 달렸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잠든 사이 고라니는 우리 집을 지나 이 산에서 저산으로 건너갔더군요. 우리 집은 울타리가 없으니, 고라니로서는 지나다니는 길목이었습니다.
햇고구마 두 포기를 캤습니다. 보랏빛 껍질에 힘줄이 돋아났습니다. 내 손등에 올라온 힘줄처럼 말이죠. 가뭄에 풀이 죽은 줄기가 밤이면 다시 살아납니다. 숲 어디에서 고라니도 고구마잎을 바라보며 침을 삼킬는지 모릅니다. 두 강아지가 밭을 지키기에 가까이 오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선녀와 나무꾼이 있는 곳을 알려준 짐승이 노루예요. 아마 노루는 하늘을 잘 읽나 봅니다. 봄이면 참나무 가랑잎 사이로 노루귀 꽃대가 올라옵니다. 노루를 닮은 꽃입니다. 나는 요즘 노루잠을 잡니다. 자다가 자꾸 깹니다.
숲은 노루며 고라니한테 큰집입니다. 숲은 곳간이고 숨이고 바다이고, 나무가 사는 집입니다, 숲은 밥이고 둑이고 병풍이고 무덤입니다. 그 사이에 노루가 살고 나도 살아갑니다.
20260828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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