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한국동시 100년 애송동시 50편 문학동네 동시집 9
강소천 외 지음, 양혜원 외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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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을 때 일이다. 돌이 가득한 언덕길을 올라가는 데 손톱만한 노란 나비들이 나폴나폴 내 발목 높이에서 날아다녔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인 줄 알았다. 바람과 나비들 때문인지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두 다리는 무거웠는데 입에서 잊고 있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고단한 몸에 동요라니. 그렇지만 정말,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고마웠다. 그렇게 한 번 시작된 노래는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로 이어지고 계속해서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이 되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실제로 열심히 실을 풀어내고 있는 거미들과 눈이 마주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소리를 지르고 나서는 또 노래를 불렀다.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동요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알았다. 시와 노래에 힘이 있다는 것을. 특히 어릴 적 불렀던 노래들 안에.

 

  우연이지만 생일 전 날, 두 권의 동시집을 선물 받았다. 맨 앞에 놓여있던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전철에서 읽다가 자꾸 목구멍에서 튀어 나오는 노래 때문에 당황했다. 책 속에 갇혀 있던 동시들이 그 동안 답답했던지 노래가 되어 살아나더니 잊고 있었던 추억들을 소환해 냈다. 친구와 두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손동작을 맞추며 불렀던 반달과수원길’, 6학년 음악시간 앞에 나가 벌벌 떨며 불렀던 과꽃등이 떠올랐다. 노래뿐만 아니라 부끄러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던 열기도, 이미 어른이 된 친구들의 개구쟁이 모습도 그대로 보이고, 모든 것이 생생했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옛날 사람이었다. 그래도 좋다. 잃어버린 유산을 되찾은 것 같아 고맙고 행복했다.

  <어느 데인지 참 좋은 델 가나 봐>는 제목과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좋은 델 가고 싶었다. 이 책속에 실린 동시들을 읽다보면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겠지.

 

개울물/ 권정생

 

빤들 햇빛에

세수하고

어느 데인지 놀러 간다

 

또로롤롱

쪼로롤롱

 

띵굴렁

띵굴렁

 

허넓적

허넓적

 

쪼올딱

쪼올딱

 

어느 데인지

어느 데인지

참 조은 델

가나 봐.

 

  의성어만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바로 시다. 권정생 선생님의 개울물을 읽으면 개울물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물고기와 풀들, 돌들, 하늘과 햇빛, 바람까지도 그대로 그려진다. 깊이 관찰한 시인만이 말할 수 있는 살아있는 언어이다. 개울물을 읽다가 언젠가 한 번 뵀던- 절친했던 교수님을 만나러 왔다가 학생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던- 권정생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는 참 이상하다. 나조차 잊고 있던 지나간 시간들을 불러오니 말이다. 짧은 글 속에 커다란 세계가 숨어 있다.

 

새싹 / 권오삼

 

딩동

누구세요?”

“1월인데요.”

…….”

 

딩동

누구세요?”

“2월인데요.”

…….”

 

딩동

누구세요?”

“3월인데요.”

, 나가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봄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재치 있는 동시이다. 제목을 보고 무릎을 쳤다. 씨앗을 품고 있는 화분에 물을 주는 여자아이가 꼭 어릴 적 내 모습 같았다. 동시를 쓰는 사람들은 마음을 낮추고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시를 쓸 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예쁘고 겸손하다. 그 눈을 닮고 싶다.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도 어느 새 지나갔다. 이상하게도 추웠다는 사실은 인정하는데 몸이 느꼈던 추위의 감각은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뾰족하게 생긴 하얀 꽃봉오리들을 발견했다. 목련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활짝 만개할 것 같다. 그 꽃송이 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어있겠지. 그러다가 힘들게 했던 추위는 금방 잊고 곧 활짝 피겠지. 내 안에 있던 시와 노래들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선물처럼 잊고 있던 어릴 적 동심과 아름다운 추억들이 동시집을 타고 찾아 온 것처럼, 미세먼지 가득한 날들 속에서도 찬란한 봄을 기다릴 수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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