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폴에 관한 이야기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내가 아는 만큼의 폴에 관한 이야기. 이것이 폴이라는 한 인간의 실체인가 하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그것을 폴에게서 배웠다. 폴 자신은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준 일 없노라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므로 나는 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63.p)

 

 

  ‘는 사랑에 빠졌다. 폴에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폴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63.p)

 

 

  ‘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은 규칙적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시간과 삶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적인 업무로 만났고, 여섯 살 차이 나는 선생과 제자로 생각했다고 해도 그들이 나눈 시간과 익숙함은 무시할 수가 없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 만남을 가져야지만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상대방이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기적이겠지만 큐피드의 화살이 어긋났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물이 흐르듯이 마음이 가는 곳까지 바라볼 수밖에. 그래서 폴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 이것은 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는 폴을 만날 즈음부터 교사 일에 염증이 났다. 몸도 마음도 가장 지치고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사람 폴. ‘가 상대방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며 상담을 해주었지만, 자신도 불연 듯 현재의 고충과 힘든 마음을 그에게 기대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폴과의 만남은 포근했고, 안정감을 주었으며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폴이 유리꼬에게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 한국말도 사랑에 빠지다, 이렇게 말하는 거라면서요. 영어도 fall in love인데. 선생님, 저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언젠가 유리꼬를 향한 그의 사랑을 알게 됐던 날 느꼈던 상실감이 다시 가슴을 차갑게 베고 지나갔다.

(73.p)

 

 

  그전까지 확실하게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에 는 더욱 참담했고, 고독했고, 괴로웠다. 그래서 몇 번 맞선을 보았고, 번듯한 직업을 가진, 머리숱이 적고 배가 나온 단정한 사람이 어떤 계기로 한국어 교사가 되셨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어쩌다 한국어 교사가 되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폴을 몹시 그리워했다.

 

 

  평범하고 극적일 것 하나 없는 사랑의 서사를 작가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의 고향집 벽에 두 부자가 오줌을 누는 장면을 보여주었을 때 아련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폴을 향한 의 마음은 이런 서정적인 장면을 지나 간다. 그리고 마음이 커지든 말든 폴은 그녀에게 유리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족들이 결혼을 반대해도 헤어질 수 없다는 것 등을 쏟아놓는다. ‘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아마 폴은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신의 고민과 아픔을 들어준 사람은 유리꼬가 아니라 그녀였으니까. 그것은 두 사람이 쌓아놓은 시간과 비례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사랑은 참 잔인한 면이 있다. 사랑을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함께 한 시간 속에서 키워온 마음과 행동을 무시할 수 없다.

 

 

…… 설혹 그림책의 한 장면처럼 달빛 아래 함께 오줌을 눌 수 있었다 해도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과 달리 아름다운 엔딩을 갖고 있지 않은 법이니까.

……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내게 실연을 안겨준 그가 더 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실연당한 여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해준 이야기가 내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

 

…… 한 번도 그럴듯하게 명명된 적이 없는 초라한 내 사랑.

(85~86.p)

 

 

  아주 짧은 세월 “Junchan”이라고 불렸다가 이 된 남자를 사랑한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사랑은 끝났어도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는 다시 누군가를 만나면 조금은 더 두려워하고, 진력을 내기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다 가끔 사랑에 빠졌던 이 생각나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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