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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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우리를 구속할 수 없다

루이자 메이 올컷<어둠 속의 속삭임>

 

 

  일본에 태풍 짜미가 몰아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다카마츠에 있는 호텔에서 나오시마 여행 계획을 점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제 밤, 짐을 다 정리하고 느긋하게 TV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태풍 때문에 여행 일정이 전부 취소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가족들은 가기 전에 통보가 와서 다행이라며, 하루만 일찍 갔으면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혔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얼마 전 홋카이도에 지진이 났을 때, 자다가 호텔이 흔들려 깨어났다며 불안과 굶주림에 떨다 귀국한 지인의 말도 생각났다. 결국 여행대신 터덜터덜 도서관에 가서 루이자 메이 올컷<어둠 속의 속삭임>을 읽었다. 가볍게 넘긴 책장은 재미있게 술술 읽혔다. 후견인인 삼촌을 따라 나선 시빌이 장차 남편이 될지도 모를 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당돌하면서도 대담한 행동을 보이는 모습에 혀를 차면서 말이다.

 

 

나 자신의 대담함을 만족스러워하면서 나는 한 팔을 삼촌 목 부근에 올려놓고 그에게 고상하게 키스한 후 더할 수 없이 자연스러운 태도로 대담하게 그의 무릎에 올라가 앉았다. (196)

 

 

그러나 곧 이 철없는 열여덟 살 소녀의 행동은 삼촌의 강하고 거센 힘에 의해 제압당한다.

 

 

삼촌은 잠시 말없이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나를 꽉 껴안으며 내 입술과 볼, 이마에 일부러 대단히 열정적으로 키스를 되돌려주는 바람에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삼촌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동안 삼촌은 내 수치심이 분노로 바뀌고 내가 단호하게 놓으라고 명령할 때까지 어둡고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197)

 

 

이 부분에서 뒤에 펼쳐질 내용들을 짐작했어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나는 학창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 소설들을 떠올려가며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시빌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한 삼촌과 교활하고 음흉한 의사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당해 피폐해져가는 그녀를 보게 되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준 자신감 속에서 나는 그에게는 경멸을, 삼촌에게는 반항을 드러내 보여 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해 나를 괴롭힘으로써 잔인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247.p)

 

 

나는 고통에서 비롯된 쓰라린 눈물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도 없는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 (249.p)

 

 

  부모를 잃고, 후견인의 도움아래 결혼을 해야 하며,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오직 젊음과 아름다움을 무기삼아 남성에 맞서야 하는 시빌에겐 힘이 없었다. 그녀의 인권과 존엄함은 너무나 쉽게 짓밟히고 유린당했다. 두 모녀를 구속할 권리가 그들에겐 없었으나 폭력이 폭력 아닌 상식의 얼굴을 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자행되어 온 것이 잔인하고 가슴 아팠다. 정신병적인 발작과 몽유병 증세를 보이며 망가져 가는 시빌을 통해 자유를 빼앗긴 인간의 밑바닥을 볼 수 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거세당하고 힘들게 살아오고 있다. 이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갈 남성들에게도 비극이다.

 

 

올컷이 소설을 썼던 19세기 중반에 감금, 폭행, 중혼, 강간 등을 다룬 선정적인 소설들이 각종 주간신문에 발표되었다는데 그것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소설을 통해 잘못된 인식을 각성하고 개선해 나가는 데 힘을 보탰을지 아니면 속된 쾌감을 느끼며 그 상황 속으로 빠져들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는 어둠 속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간절한 속삭임을 듣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미투 운동을 벌이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맞서는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것일까. 실험기구가 폭발하는 사고 때문에 겨우 정신병원을 탈출한 시빌를 만나 안정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지만, 그녀가 계속해서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함께 그 자유를 누리고 인정하며,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여성뿐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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