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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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해서 각종 영화를 찾아다니며 보던 시절, 시대나 장르를 가리진 않았지만, 스릴러, 공포, B 무비를 특히나 좋아했더랬다. 특히 공포 영화나 B 무비는 한계, 격식 따윈 나 몰라라 하는 상상력 덕에 의외로 즐거움을 선사 받는 경우가 꽤 있었다. 남다른(또는 병맛) 유머 코드가 그랬고, 불합리나 부조리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간 설정들이 그랬다. 하지만 이때 우리나라 공포 소설은 그렇지 못했다. 말 그대로 공포가 핵심인 소설이었다(물론 영화도 이런 영화들이 많았지만 다는 아니었다). TV에 나오는 무서운 이야기 같은, 소름 끼치고 오싹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줄거리들. 그러다 보니 뒷맛이 개운치 않았고 어느 시기부터 공포 장르를 의도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독서뿐만 아니라 영화도). 아마도 러브크래프트 전집이 마지막이었을 거다(이 작가 작품들도 여러 의미로 정말 만만치 않다). 그리고 1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나버린 지금, 오랜만에 공포 소설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조예은 작가의 단편집이다. 단편 소설 4편이 실려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살짝 공포가 가미된 채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소설이라 보면 될 듯하다.

 

<초대> 4편 중 공포 소설이란 명칭에 가장 걸맞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억압, 강요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부모가 자식에게, 연인 사이에서, 서열이나 권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 폭력과 다름없다는 걸 의식도 하지 못한 채 행해지는 많은 행동과 말들이 한 개인을 어떻게 옭아매는지를 생각해 보게끔 한다. 물론 한 개인의 외면과 내면을 완전히 분리해 별개의 존재처럼 서술하기에 논리를 뛰어넘는 전개 방식이다.

 

<습지의 사랑> 귀신들의 사랑 이야기. 물에 빠져 죽은 지 너무 오래돼서 원래의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물귀신과, 비교적 최근에 죽어서 숲속에 사체가 유기된 여학생 귀신의 썸타는 과정이 그려진다. 우리와 다른 존재의 이야기다. 하지만,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아예 다른 존재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귀신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칵테일, 러브, 좀비> 영화로 치자면 B 무비와 가장 가깝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집안의 가장이 좀비가 되는데 그 원인이 뱀술 때문이란다. 아내와 딸은 그래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어떻게든 관계를 유지해 보려 하지만 배가 고파진 좀비 아빠는 딸을 한입 덥석 물고야 만다. 딸을 구하기 위해 골프채를 휘두르는 엄마와 상황 정리를 위해 아빠를 골로 보내며 내뱉는 엄마의 말들. “빌어먹을 양반, 끝까지 자식 새끼한테 민폐나 끼치고.”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는 가부장에 대한 풍자쯤 되겠다. 킥킥거리며 읽기 딱 좋은 단편이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남편이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아들이 그 칼을 뺏어 아버지를 찔러 죽인 후 자기 목을 찌른다.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 어떤 목소리가 속삭인다. 시간을 세 번 되돌릴 수 있다. 그렇게 하겠는가? 달콤한 유혹이다. 그런데 그 유혹을 받아들인 아들의 선택은 자신이 아버지를 먼저 죽이는 거다. 불행의 원인을 찾아 모두가 행복해지는 게 아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만을 살리는 것. 아버지는 괴물이고 나 역시 괴물이라는 인식. 어쩌다 인식 밑바탕에 긍정이 아닌 부정이 도사리게 된 걸까? 하나의 이야기가 더 있다. 이 둘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이 비극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비극으로 남는다.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 뒷맛이 개운치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종류의 공포 소설은 아니었다. 아주 무난한, 공포(비논리)가 살짝 가미된 장르 소설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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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레 미제라블 5 (한글) 더클래식 세계문학 85
빅토르 위고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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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내용만 본다면, 6월 혁명의 마무리와 그 이후 이야기다. 혁명의 한복판에서 많은 등장인물의 삶과 죽음이 엇갈린다.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여주던 이야기는 장발장이 탈출구로 하수도를 선택하면서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샛길로 빠져나간다. 한참을 파리의 하수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진창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4권까지 읽어서 단련된 상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탓인지 5권 내용에 대한 집중력이 가장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주요 인물들이 걸어왔던 삶에 나름 책임을 지는 순간이기도 해서다. 마리우스와 코제트에겐 죄책감과 상실감이 들러붙겠지만 함께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갈 여력이 충분해 보인다. 자비에의 선택은 나름 충격적이지만 고지식하게 앞만 바라보고 살았던 그의 성향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싶다. 테나르디에는... 내 처지에서 보면 가장 뜻밖의 운명을 받아 든 인물이었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란 의미를 작중 딱 한 번 설명한 곳이 있는데 그게 바로 테나르디에가 나오는 장면에서였다. 불우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그런 상황에 빠진 사회 계층. 작가는 정치 사회 개혁과 교육을 통해서 이들을 교화시켜야만 그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테나르디에는 경멸과 멸시를 얻을지언정 마리우스로부터 돈을 얻어 미국으로 건너가 노예 상인이 된다. ‘민중이란 존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 작가지만 6월 혁명의 실패와 함께 테나르디에의 운명을 통해서도 뜻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명확하게 얘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애석하게도 여기까진 <레미제라블>의 주변 인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 소설의 핵심은 개인적인 생각에 두 가지다. 하나는 1790년대부터 1830년대 중반 정도까지 프랑스의 정치 사회 상황의 격변. 다른 하나는 그 시기를 관통하는 장발장의 삶. 프랑스의 몇몇 혁명과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여력이 되면 따로 써볼까, 생각 중이다. 대신 이 글에선 장발장의 삶, 그의 고뇌에 집중해 보려 한다.

 

(1권 절망의 구렁텅이) 그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이 숙명적인 사건에서 과연 그 혼자서 잘못을 저질렀던가? 첫째로 그는 좋은 일꾼이었지만 추운 겨울,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열심히 살아간 그가 빵을 갖지 못한 것을 그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다음으로 잘못된 선택이 벌어지고 그가 자백했음에도 형벌이 너무 무거웠던 것은 아닌가?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죄의 정도와 맞았던가? 형벌은 뉘우침에 너무 치우쳐 있던 것은 아닌가? 형벌이 아무리 무거운들 이미 벌어진 범죄를 무화할 수 있던가? 무거운 형벌은 사태를 악화시키고, 죄인을 희생자로 만들고, 채무자를 채권자로 만들고, 범죄를 저지른 인간을 결국 법으로 용서해 준다고 든다. 탈옥으로 형기가 늘어난 것은 어땠는가? 강자 앞에서 약자는 얼마나 무력했는가? 사회는 개인에 대해 무죄였는가? 19년마다 매일매일 죄는 늘어나지 않았는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회는 그 안의 부조리와 무자비함을 구성원에게 떠넘길 권리가 있는가? 한낱 불쌍한 영혼을 고통과 결핍 속에 몰아넣을 권리가 있는가? 우연히 이루어진 재산 분배에서 탈락한 불쌍한 사람들, 가장 동정받아 마땅한 그들을 사회가 매몰차게 대한다면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는 묻고 또 물었다. 그는 스스로 사회를 재판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미리엘 주교를 만나 교화되기 전 장발장의 관점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그 후 몇 년 동안 혼란했던 시절, 그는 빵을 훔치고 감옥에 들어간다. 법은 가혹했으나 형량이 19년까지 늘어난 건 끊임없이 탈옥을 시도했던 그의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책임을 사회로 돌린다.

 

(1권 프티 제르베) ', 나는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 하고 소리친 순간, 그는 자신을 되찾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 대했다. 지팡이를 들고, 작업복을 입고, 훔친 물건으로 꽉 찬 배낭을 지고, 음울하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악한 생각을 품고 서 있는 죄수 장발장의 모습 말이다. 과거의 불행들은 그를 괴이한 몽상에 빠지게 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한 모든 것도 환상처럼 여겨졌다. 그는 진실로 그 앞에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는 장발장을 만났다. 그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 혐오감을 느꼈다.”

 

사회를 악으로 돌리고 자신을 방어하던 그가 미리엘 주교를 만나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 드디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단순 인식으로 끝났다면 테나르디에처럼 그의 인생은 바뀔 일이 없었겠지만, 다행히 그는 현재의 자신을 혐오함으로써 변화를 선택하게 된다. 미리엘 주교의 용서가, 다짐이 그에게 갈등의 씨앗을 뿌렸고, 그 씨앗이 변화를 싹틔운 후 무럭무럭 자라 엄격한 양심, 보편적 인류애로 성장한 셈이다. 그 탓인지 장발장은 작품 내내 특정 정치 성향을 띄지 않는다. 그는 약자를 돕고, 악인을 설득하고, 악연으로 얽힌 자를 용서한다. 미리엘 주교의 하위 버전이랄까.

 

(1권 머릿속의 폭풍) 드디어 진리를 찾았다. 나는 결론을 찾았다. 더 생각하려면 끝이 없는 일이다. , 이제는 그 결론에 따르자. 더는 갈등하지 말자. 이 모든 것은 타인을 위해서일 뿐 나 때문이 아니다. 나는 마들렌이다. 마들렌으로 살자. 장발장은 불행해질 것이다. 장발장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를 모른다. 절대 그를 모른다. 누군가 장발장이 되었다면 그건 그가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나와는 상관없다. 장발장은 암흑 속에서 불행한 인생을 사는 자의 이름이다. 누군가 그 이름을 머리에 쓴들 그것은 그의 불행이다.”

 

신분을 감추고 마들렌이란 이름으로 한 도시의 시장까지 된 장발장은 자비에로부터 곧 벌어질 어떤 재판에 대해 듣게 된다. 도난 혐의로 잡힌 한 사람이 과거 죄수였던 장발장으로 의심(거의 확신)을 받아 곧 재판받게 될 거라고. 그러자 그는 갈등한다. 자신이 직접 가서 자백하고 그 무고한 자를 구해낼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그냥 살아갈 것이냐. 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한다. 가야지 했다가도 또 아니야, 가만있어야지. 그러기를 여러 번.

 

(1권 머릿속의 폭풍) 장발장! 언제고 네 주변의 목소리가 네게 말을 걸 거다. 너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 그 소리가 너를 영원히 저주할 거다. 이 야비한 놈아! 너를 향한 모든 감사는 하늘에 닿기 전 모두 떨어져 내리고 하느님께 올라갈 때는 저주만이 함께할 것이다.”

 

그의 일생에 걸쳐 그를 가혹할 정도로 옥죄이는 게 바로 저 양심의 소리다. 미리엘 주교의 하위 버전이라 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미리엘 주교는 거의 성인에 가까운 인물이고, 장발장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지울 수 없는 원죄를 무시하고 그로부터 파생될 많은 것들에 고개를 돌릴 것인지 말 것인지.

 

(1권 특별 입장) 그는 밤새도록 생각했다.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서 '!'라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15분쯤이 지났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괴로운 한숨을 지으며,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다시 발길을 돌렸다. 기진맥진한 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누군가 도망치는 그를 따라와 그를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법정 앞에까지 갔다 돌아선 그의 발걸음을 결국 양심이 돌려세운다. 장발장의 양심은 미리엘 주교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겠다.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켜보는 눈. 그래서 그렇게 끝까지 그에게 가혹했는지도 모른다.

 

(2권 불행한 두 사람이 함께해 행복을 만들어내다) 싱싱하게 되살아난 가없은 늙은 마음이여! 다만 그는 쉰다섯 살이고 코제트는 여덟 살이었으므로 자신이 앞으로 평생 품게 될 모든 사랑은 이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하나의 빛 속으로 슬그머니 녹아들었다. 흰빛이 두 번째로 나타난 것이다. 미리엘 주교는 그의 마음의 지평선에 미덕의 새벽빛을 가져다주었으며, 코제트는 사랑의 새벽빛을 가져다주었다.”

 

법은 또 한 번 그에게 가혹했다. 아니,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진 많은 이들에게 가혹했다. 장발장은 다시 장발장이 되어 투옥되었으나 탈옥한다. 그리고 팡틴의 딸인 코제트를 테나르디에 부부의 손아귀에서 빼낸다. 소설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지만(내가 제대로 기억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장발장의 이번 탈옥은 사회 밑바닥 계층을 돌볼 줄 모르는 가혹한 법에 대한 반대급부 정도로 그 정당함과 불가피함을 부여하는 듯하다.

 

(2권 수도원 생활) 그는 자주 한밤중에 일어나 결백하면서도 엄혹함 아래 짓눌린 수녀들이 부르는 감사의 찬양 소리를 감동하며 들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정당하게 벌을 받는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것은 오직 저주하기 위해서였음을 생각하고 지난날 자신 또한 하느님을 향해 삿대질을 했던 일을 생각하면서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자비에의 추격을 피해 수도원으로 숨어 들어간 장발장과 코제트. 그는 그곳에서 또다시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미리엘 주교의 숨결을 의식하게 된다. 동시에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된 수도원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리고 코제트를 보며 느끼는 한없는 기쁨까지.

 

(4권 비밀의 집) 이 행복은 오롯이 나의 것일까? 사실은 남의 행복, 이 아이의 행복을 나 같은 늙은이가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아닐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은 도둑질과 같은 것 아닐까? 사실 이 애는 인생이 뭐라는 것을 알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은가! 처음부터 본인의 생각은 듣지도 않고 고통에서 구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삶이 주는 모든 기쁨을 이 애에게서 강제로 뺏는 것, 이 애가 세상물정을 모르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용해 순수성만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한 인간의 본성을 해치는 것이고 신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뒤늦게 그 모든 것을 깨닫고 수녀가 된 것을 후회하는 날, 코제트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마지막 생각은 매우 이기적이고 다른 무엇보다 남자답지 못한 생각이었지만, 코제트가 자신을 원망할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수도원에서 나오기로 결심했다.”

 

마리우스 중심으로 서술되는 3권에서 분명 장발장과 코제트로 보이는 인물이 공원에 등장해 마리우스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다. 수도원에 있어야 할 그들이 어째서 속세에 나와 있을까? 그 이유를 4권에서 알게 된다. 장발장은 이제 철저히 코제트를 위한 삶을 산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자들을 돕지만 코제트가 그의 삶의 목표이자 행복이자 모든 것이다.

 

(4권 다시 그것을 넘어선 슬픔) 그래 맞아. 그럼 놈은 대체 뭘 찾으러 오는가? 사랑의 모험을 하려 하는가! 무엇을 탐내고 있는가? 사랑의 유희를 탐내는 것인가.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더없이 비참하고 불행한 인간이고, 인생 60년을 남에게 복종만 하며 보내왔고 참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참아 왔고 젊은 시절도 가 버렸고 가족도 친구도 아내도 자식도 없이 살아왔으며, 온갖 돌 위에 들판 위에 벽 위에 피 흘리며 살아왔다. 갖은 수모를 받고도 참았고 어떤 심술궂은 일을 당해도 착하게 살아왔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살아왔는데,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남이 나에게 한 나쁜 짓을 용서하고 이제야 겨우 그 보답을 받고 행복해하고 있는 이때,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은 지금, 대가를 치르고 내 것으로 만든 지금. 그 모든 것이 사라지려 하는가? 나는 결국 코제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건가? 생명을, 기쁨을, 영혼을 잃어버리는 건가? 그것도 저 바보 같은 녀석 하나가 뤽상부르 공원에 와서 얼쩡거리는 것 때문에!"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이 무르익어가자, 그것을 알아챈 장발장은 심하게 갈등을 겪는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빼앗기는 듯한 아버지의 심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코제트는 장발장의 삶 그 자체다. 코제트를 위해 탈옥을 한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두 가지가 지배했다. 미리엘 주교로 대변되는 양심과 코제트. 양심이 삶의 방향을 정해준다면 코제트는 행복의 척도다. 행복이 없다면 그의 삶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5권 가방 속에 든 물건) 코제트와 둘이서 그 숲을 지났었다. 그때의 날씨, 낙엽진 나무들, 새들이 떠나 버린 나무들, 햇빛이 비치지 않는 하늘을 그는 기억해 냈다. 그래도 즐거웠던 한때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장발장은 침대 위에 늘어놓은 작은 옷가지들을 하나씩 눈여겨보았다. 코제트는 이 옷들과 똑같이 조그마했었다. 커다란 인형을 팔에 안고 루이 금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은 채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걸었다. 그녀에게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장발장밖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의 숭엄한 백발이 맥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 강인한 늙은 가슴은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의 얼굴은 코제트의 옷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만약 그때 계단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무섭게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장발장은 보편적인 잣대로 개인적인 삶을 살려 했지만, 주변 상황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런 게 정치고 혁명이다. 많은 걸 휩쓸 듯 쓸어가 버리는 것. 그것이 목숨이라 할지라도. 6월 혁명의 한복판에서 장발장은 마리우스의 목숨을 구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할 수 있었다. 그게 코제트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 여겼음에 분명하다. 결혼식을 마치고 피로연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 장발장은 흐느낀다. 모든 것을 잃었으니까. 왜냐하면...

 

(5권 지옥과 천국) 잠자코 있는 게 아무것도 아닌 일일까. 침묵을 지키는 게 간단한 일이겠소? 아니오, 간단하지 않소. 침묵이 거짓말이 되는 수도 있소. 그리고 나의 거짓말을, 허위를, 비열함을, 비겁함을, 배신을, 죄를, 나는 한 방울 한 방울 마시고 토해 냈다가, 다시 삼키고, 한밤중에 끝냈다가는 한낮에 다시 시작할 것이고, 또 나의 아침 인사도 거짓말이 되고, 밤 인사도 거짓말이 되어, 나는 그 거짓말 위에서 자고 그 거짓말을 빵에 발라 먹고, 그리고 코제트와 얼굴을 맞대고, 천사의 미소에 지옥에 떨어진 자의 미소로 대답하는, 가증스러운 사기꾼이 되는거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소?”

 

장발장의 양심은 가혹하게도 자신의 과거를 숨기도록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 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라는, 낙인에 가까운 그런 인식은 발각되었을 경우 코제트에게 큰 짐이 될 것이고, 발각되지 않는다 해도 코제트와 그의 남편인 마리우스와 매일 집에서 마주치며 살 의도가, 용기가 그에겐 없다. 코제트가 마리우스와 결혼을 하면서 양지로 나서자 더 이상 감출 수가 없게 된 셈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책에 대한 평가 중에 장발장의 구원이란 단어가 여기저기 등장하곤 한다. 정말 장발장은 구원받은 걸까? 사회와 법률은 끝내 그에게 가혹했고(그를 제대로 알기 전까진 마리우스조차 장발장을 멀리하려 했다), 그 자신마저도 스스로에게 가혹했다.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 숱한 고뇌와 갈등을 이겨내고 종교적 성인의 느낌을 줄 정도의 삶을 살았다. 마지막에 다가온 좌절은 그의 삶을 거의 망가뜨렸지만 최후의 순간 선물같이 도착한 코제트와 마리우스로 인해 그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해피엔딩. 그래도 구원이란 단어가 여기에 맞는 건가? 한참을 생각하다 구원이란 단어에 사회성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 말이 맞겠구나 싶더라. 그리고 그제야, 그러니까 구원이란 단어의 속박에서 벗어나서야 <레미제라블>이 사회개혁 소설이란 말도 명확하게 이해가 됐다. 한 개인이 변화를 통해 구원을 얻는 이야기는 물론 감동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각종 불합리한 것들을 지적하고 상기시키면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4개월이 넘게 붙잡고 있던 소설이었다.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게, 작가의 문체를 얼마나 살려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어서 단정지을 순 없겠지만 앞으로 책을 고를 때 작가 이름에 빅토르 위고란 글자를 본 순간, 멈칫할 거라 본다. 그렇다고 아예 손절할 거 같진 않다. 뮤지컬 쪽에 이 작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유명한 작품들이 꽤 있어서 궁금한 거 또한 사실이라.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빅토르 위고 이 양반은 안 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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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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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면서 그 사람이 겪어온 삶은 그로 하여금 자신만의 독특한 세상을 품게 만든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 역시 직접 겪어보기 전엔 그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것이 빛이 가득한 평온하고 안정된 세상인지, 아니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세상인지. 몇 번 만나보는 것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수십 년을 살고도 그 존재 자체만 알 뿐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는 세상도 있다. 후자의 경우처럼 꾹 숨어있다 나온 세상일수록 충격과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관계라는 거미줄을 타고 그 영향력은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겠고.

 

내게도 나만의 세상이 있다. 물론 나 스스로 이 세상을 직접 체험했기에 알게 된 세상이다.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 줄 말이다. 내 세상의 중심엔 어머니가 있었다.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 심적 고통이 크셨을 테고, 자식들을 위해 많은 걸 희생했으면서도 말년엔 자식들 걱정 때문에 안절부절못하셨던, 그런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연민과 죄책감이 똘똘 뭉쳐서 내 안에 똬리를 틀었고, 그것은 어머니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 언제든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나는 몰랐지만. 30대 초반쯤.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를 괴롭히고 있을 즈음 악몽이 내게 찾아왔다. 2~3일에 한 번씩 가위에 눌리고 그럴 때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서 존재하는지, 존재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무언가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잠이 드는 게 무서웠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어느 날 또 가위에 눌렸고 몸부림을 치던 중, 그 무언가가 어머니를 언급했다. 그 순간 색채가 바뀌었다. 공포와 무기력과 회피가 지배하던 세상을 오로지 딱 하나, 분노가 휩쓸었다. 그 무언가의 놀란 표정을 본 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난 내가 아는 욕을 모조리 내뱉었고 그 순간 가위에서 풀렸다. 현실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도 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렇게 난 그 무언가에서 벗어났다. 오직 내 삶에만영향을 미친 하나의 예일 뿐이다.

 

<7년의 밤>은 그런 세상들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들 모두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자기 안의 세상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엮이면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물러설 수가 없다. 간혹 물려받은 것이라 착각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세상이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물러선다는 건 자신의 근본부터 갈아엎는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결국 세령호란 호수를 배경으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그 이후 7. 세령호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최현수와 오영제는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최현수는 자신을 돌아봤고, 오영제는 변하지 않았다. 7년은 현수와 영제 두 사람뿐만 아니라 현수의 아들인 서원과 서원의 보호자인 승환에게도 어둠이 들어찬 시공간이었겠으나 그 시공간에 새벽을 밀어 넣을 수 있었던 건 현수의 변화와 승환의 선택 때문이었을 거다. 그 덕에 작가가 인용했던 빅터 프랭클의 문장,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 조금은 수긍이 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피해자와 가족들이 결국 그 문장에 도달했으면 하는 강력한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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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지금 죽으러 갑니다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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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설과 성선설. 학교에서 배울 땐 그런가 보다 했지, 둘 중 어떤 것도 믿어 본 적은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대부분사람은 백지상태로 태어나 환경에 따라 기억과 망각을 거치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는 거. 다만 어떤 생명이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기에 그것을 얼마나 적절히 조절하느냐에 따라 선악의 구별과 정도가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다. 뜬금없이 무슨 얘기인가 싶겠지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내 경우는 저런 생각이 떠오르더라라는 얘기.

 

존속 살해에서 시작해 동반자살을 거쳐 연쇄 살인을 지나 다시 존속 살해로. 뭐랄까. 화려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이 반찬 저 반찬 맛있게 먹고 배가 너무 불러서 수저를 딱 내려놨는데! 아우, 맛은 있는데 이젠 다른 걸 먹어야겠구나. 신체적, 물질적 포만감과 정신적 포만감이 서로 엇나가버린 상황. 아마도 한 작가의 글을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다. 재미는 있다. 뒤가 궁금해서 다음 화면을 계속 불러오는 거 보면. 하지만, 그래도 잠시 멈추고 다른 길로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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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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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 건널목. 아침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다. 옆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으, 으 소리를 내며 불안해한다. 이유는 바로 눈앞 찻길에서 두 발로 왔다 갔다 하는 비둘기 때문. 여학생의 소리에 따라 내 얼굴도 같이 찌푸려진다. 승용차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지만 녀석은 날개를 쓸 생각이 없다. (? 새라면 날아야 하잖아?) 빠각. 온몸이 내지른 날카롭고 건조한 절규. 버스가 지나간 뒤 차도엔 조금 전까지 비둘기였던 존재가 납작하게 짓눌려 있다. 새는 발성 기관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여학생이 존재를 마감하는 비명을 대신 내질렀다. (본질을 망각한 존재의 소멸. 무엇이 비둘기가 날지 않게 했을까? 난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내 본질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날 위해, 아니 날 대신해 비명을 질러줄 사람들이 있을까?) 녹색불이 들어오자, 얼굴을 찌푸린 채 황급히 건널목을 건넌다.

 

오후 4시경. 지하철 안. 다들 손에 든 스마트폰에 시선을 둔다. 손안에 쥔 또 하나의 거대한 세상 속으로. 별안간 울려 퍼지는 외침이 있었다. ‘버르장머리 없게 어디서!’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나이가 그냥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께 내지른 소리다. 간혹 하나의 단어가 모든 이미지를 압도할 때가 있다. 이 경우는 버르장머리’. ‘꼰대란 이미지가 머리에 그득 차오르면서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사라진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이 충분히 화를 낼 만한 것이었는지. 그런 건 이제 의미 없다. 그저 꼰대. 언어와 사회현상이 어우러져 발휘하는 엄청난 힘.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힘이 곧 발휘된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들.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자리를 피해버리는 사람들. 고독? 무관심? 이기주의? 귀찮음? 문득 떠오르는 비둘기.

 

이 책은 이런 식의 글쓰기를 지향한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 보이는 일상을 그대로 적되 작가 자기 생각은 직접 드러내지 않는 방식의 글쓰기다. 사진이 정지된 장면만으로 충분히 많은 사유를 하게 하는 것처럼 글 또한 그게 가능하기에 그걸 시도해 본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스스로 실패를 자인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끼어드는 내 생각들, 그걸 어찌해 볼 수가 없었던 거다. 나 역시 실패다. 첫 번째 단락은 괄호 안에 문장들을 뺀다면 얼추 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겠지만 두 번째 단락은 뭘 빼고 자시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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