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ㅣ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7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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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세 개가 떨어지다> /김채원


사는 게 명확했으면 싶다.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고. 이리 가면 이게 나오고 저리 가면 저게 나오고. 이름표나 도로 표지판처럼. 하지만 그런 삶은 많지 않다.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삶은 복잡해지고 돌변한다. 그렇다고 혼자 울타리를 둘러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다 끊임없이 상처를 헤집을 거고, 자신을 또는 타인을 용서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우리 삶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게 가장 먼저여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다시 시작해서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고, 그냥 보다 보면 알게 될 수도 있고, 이래서도 괜찮고 저래서도 괜찮을 수 있는.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원칙 아래에 모든 것은 우연과 찰나의 연속일 수도 있음을 수긍해야 한다. 그러면 버겁도록 환하고 무거운 개별적인 삶에서 우린 조금이나마 힘을 뺄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다 소중하지만, 모두가 별이 되어 어딘가 고정된 채 환히 빛나야 할 이유 또한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추도> /길란


가난이 맹목적으로 이 땅을 휩쓸던 때가 있었다. 어디에나 가난이 널려 있어서 그저 처절함을 즐기면 그만이었던 시기.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에게만큼은 이 가난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여겼다. 누군가는 밤을 새우고 누군가는 저 멀리 타국까지 가서 자신의 시간을 불태웠다. 그렇게 해서 가난은 점차 설 자리가 좁아졌다. 가난은 시대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휘적휘적 다니며 길거리 돌멩이처럼 발에 차이는 처절함은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았다. 가난은 조용히 기다리며 살폈다. 풍요 속 빈곤의 시대를 지나며 가난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허영과 욕심을 두 축으로 판을 다시 짰다. 진짜 가난한 자는 생존을 위해, 가난하지 않은 자는 투자란 이름으로, 부자인 자는 차별화를 위해 가난을 끌어들였다. 풍요 속 상대적 빈곤의 시대. 가난은 다시 세상을 휩쓴다.


2026년.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가 열리려고 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가난한 우린 많은 것을 잃었고,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을 언제든 놓아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가난은 진심을 담아 우리에게 댓글을 남기는 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꼭 죽어야만 죽은 건 아니다.


<나는 야구를 사랑해> /남의현


필드에 가만있는 사람이 많다. 필드에서 나가는 사람이 많다. 공을 노려보고 쫓다 한 사람이 잡는다. 공만 보고 뛰다 부딪혀 다칠 수도 있다. 몰랐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야구가 어떤 삶을 대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그의 삶이 반영됐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구야, 현실이든 허구든 자기 삶을 함께하기가 미안한 삶으로 규정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쳤을지 상상하기도 싫구나.


이야기에 묻어있던 많은 감정들을 돌이켜 본다. 희망? 오기? 집념? 그 어떤 것도 핵심은 아닌 거 같다. 무엇이라도 붙잡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셋 모두 가능하겠지만, 내가 느낀 건 어떤 절망이었다. 절망 앞에 ‘어떤’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온전한 절망이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나 하는 의문 때문에. 동력도 필요 없고, 그저 관성이었던 걸까? 등장인물인 ‘나’가 자신을 잘 돌봤으면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관성에 따라 흐를 뿐이다.


<히데오> /서장원


아파봤던 사람이 타인의 상처를 더 이해하기 쉽다.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당시 히데오는 어머니가 한국인이란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졌고, 그 일로 인해 그의 일본 생활은 끝을 맺는다. 대한민국에 와서 한국 이름으로 성장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연극 오디션에 지원한 그가 지원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자신도 사람을 때려 주고 싶었다고.


분하고 억울했을 거다. 어디에도 완벽히 속하지 못하고 차별받아야 한다는 게. 현실이 아닌 연극에서나마 그 마음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겠지.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받아들여질 거고, 소설의 이야기는 아마도 여기까지인 듯. 그런데 인정받지 못해서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씩 쌓인다면? 그래서 상처를 잘 아는 자들이 모여 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상처를 들쑤신다면? 우린 앞으로 수많은 히데오, 수많은 차별과 맞닥뜨릴 거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끔찍한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다.


<귀신이 없는 집> /위수정


옛날 교토에 코요라는 귀족 집안 여성이 있었다. 총애를 받았으나 모함으로 추방되었고, 유배된 시골 마을에서 능력을 발휘해 그 마을을 번성케 했다. 사람들은 코요를 귀녀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코요를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그 마을을 토벌하기로 한다. 코요는 서른셋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그 마을은 그 후 ‘귀신이 없는 마을’을 뜻하는 기나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우리는 한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며 모든 것을 바칠 듯 절실히 매달릴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 삶이 안정되면, 그 간절함과 절실함은 절대 예전 같을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겠지만, 종종... 어쩌면 상당수가 그것을 변질시킨 채 간직한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은 사라지고, 내 삶에 유용하게, 추하지 않고 번듯하게 가꾸고 누리려 한다. 그러다 보면, 공감대는 사라져 오직 자신만의 무언가가 되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나마 스스로 발견하면 다행이다. 깨닫지도 못하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일 테니.


작가에 따르면, 첫 번째 단락에 적은 일화를 기반으로 단편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귀신이 없는 마을. 코요가 없는 마을. 알맹이가 없는 마을. 우린 이런 일들을 많이 접한다. 기득권이 된 정치인들의 이념, 기득권을 쥔 중년 남성들이 외치는 여성 평등, 넉넉한 자들이 외치는 사회주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진정성과 정당성까지 복잡하게 얽혀 꼬여버린 갈등들.


“여기엔 아무도 없네요. 사람도. 귀신도.”

- <귀신이 없는 집> 중에서


난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제목을 <귀신‘도’ 없는 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일일야성/一日野性 > /이미상


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할 때가 있다. 단순히 비교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경수는 흐릿해지는 자신의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해 아내인 운주의 격을 떨어뜨린다. 같잖은 남편의 변화가 어이없지만, 한편으론 권태기와 함께 가라앉는 자신과 다르게 변화를 꾀하는 경수가 여러모로 달리 보이기도 한다. 운주는 중고등학교 때 놀던 시절을 함께 한 선숙에게 연락하고 추억에 빠져들어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다.

이후 운주가 맞닥뜨린 건 자신이나 선숙도 결국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서로를 끌어들였었다는 사실. 그나마 선숙은 현재 자기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듯 보이지만 운주는 그조차도 아니다. 게다가 권력관계가 명확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들은 운주를 계속 현실로 끄집어낸다. 돈과 폭력과 계급이 만들어내는 층위와 그것을 넘나드는 선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때론 자존감을, 때론 모멸감을 선사하기도 하는 법이다. 경수는 남성성을 상실한 대신 아내를 낮춤으로써 자신을 높였고, 선숙은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잃었지만 윤주를 통해 최고 의사에게 디스크 수술을 받을 기회라도 넓혔다. 상대방을 이용해 자존감을 얻는 이 게임에서 운주는 무엇을 건졌을까? 깨달음? 삶에서 얻는 깨달음은 보통 씁쓸하던데.

“산세가 깊어 캠핑 스폿으로 유명한 모 지역은 군의 슬로건까지 바꾸었다. J군에서 보내는 일일야성. 문명이 지워낸 나를 다시 찾는 하루.”
- <일일야성> 중


<적들이 산에 오를 때> /함윤이

"즐거울 테고,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 ... 그 말에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는 노아가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불현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노아의 양손을 쓰다듬곤 했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네 이름은 더 낫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모두를 인도하는 이름인걸. 그 새로운 세상에선 모두가 배부르고, 즐겁고, 따뜻할 테고..."
- <적들이 산에 오를 때> 중에서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상에선 '믿음'이란 단어는 종교와 가장 밀착되어 있었다. 물론 어디에나 쓰일 수 있는 단어지만, 단짝을 찾으라고 한다면 믿음과 종교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믿음의 단짝이 정치로 바뀐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게 맞다! 옳소! 그리고 내달린다. 넌 틀렸다! 옳소! 역시 내달린다. 확신에 찬 소리가 양쪽에서 울려 퍼지고, 거칠게 충돌하며 울리는 파열음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소란 속에서 정말 모두가 즐겁고 배부를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올까? 확신은 나와 우리를 견고하게 둘러싸고, 그 외부는 불신과 혐오가 넘친다. 믿음과 손을 잡은 정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불신과 의심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포섭한다. 내게로 오라. 저들을 물리쳐 우리가 즐겁고 배부른 세상을 만들어보자. 적들을 만들어내고 믿음을 강탈한 세상. 도대체 저 문장 어느 구석에서 '좋은' 세상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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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저녁을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는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 친구의 일 끝나는 시각이 9시 전후라 늦은 식사에 두어 시간 보낸 후 후딱 헤어졌겠지만, 이날은 다행히 우리 모두 쉬는 날이었다. 이 동네는 내가 대여섯 살부터 20년을 넘게 살았던 곳이다. 동네를 떠난 후 다시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익숙한 무엇이 존재하는 장소. 우린 모처럼 함께 다녔던 초등학교를 찾아간다. 그땐 ‘국민학교’였고, 특이하게도 대학 캠퍼스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겼고, 대학의 다른 건물로 사용 중이다. 학교 건물을 지나 당시 옆문으로 불렀던 조그마한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친구와 보조를 맞추며 걷던 내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며 그 옛날 어느 시절의 풍경 속으로 뒷걸음질 친다.


80년대 중반. 아마 4학년쯤. 학교에서 대절한 버스에서 내린 남자아이는 이제 집으로 가면 된다는 홀가분한 마음에 젖어있었다. 전체 학교 학급 임원들을 모아 어딘가에 견학을 갔다 온 후였다. 그런데 선생님과 인사하고 일행이 모두 흩어지고 나서도 남자아이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같은 반 여자아이가 자기를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해서다. 부탁을 거절할 만큼 똑 부러지지 못했던 남자아이는 그러자고 하며 발길을 떼었다. 대학 건물 뒤쪽의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고, 옆문을 통과했다. 이성에 일찍 눈뜬 여자아이와 이성을 감도 잡지 못했던 남자아이. 어른들이 그때 그 광경을 봤다면 피식 웃었겠지만, 당사자 둘은 나름 심각했었을 시간이 흘렀다. 기대감에서 초조함으로, 당황함에서 더 큰 당황함으로. 같은 길을 걷는 발걸음에 다른 감정이 스며들었다. 남자아이에겐 아주 긴 시간이었다. 여자아이가 대문 뒤로 사라지자, 남자아이는 의문을 가득 품고 무작정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아니, 쟤가 갑자기 왜 저런데?’


내가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친구가 뒤를 돌아보며 묻는다. 왜, 다리 아파? 아니, 여기 많이 변했네. 그러게, 예전엔 단독주택이 많았는데 지금은 다 연립으로 바뀌었어. 그랬다. 외형이 변했다. 심지어 길도 변했다.


5학년. 남자아이는 여전히 이성에 둔감했지만 한 학년 많은 어떤 선배 누나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알았다. 그땐 몰랐다.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은 건 한참이 지나서였으니까. 작년 짐 정리를 하면서 초등학교 앨범을 뒤적였다. 무심코 기억을 더듬던 나는 선배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엔 알아보지도 못했다. 짝사랑이란 감정에 얽힌 추억이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시켜 놓은 탓이다. 세상에나. 건물도, 길도 변해버린 장소에서 기억은 잊지 않고 추억을 더듬는다. 하지만 추억이란 건 보정 작업을 거친 기억과 같은 것. 그 너머를 살피지 않는다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억의 여백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과거는 내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말한다.


이 시간에 이렇게 걸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현실은 확고한 것. 우리 발걸음을 통해 지금 이 길에 어떤 감정이 스며들지 알 수 없으나, 네가 있어서, 내가 있어서, 그렇게 우리가 여전히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꼬리말) 이번에 AI가 던진 문장은, ‘기억은 도시의 지도이고, 잊음은 그 지도의 여백이다.’ 지난번 썼던 <도시는 걷는 속도로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의 연장선에서 나온 문장인 듯하다. 한동안은 이런 식으로 꼬리를 물며 과거를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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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9-1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 기억이 스며든 길을 걸으면 완전히 망각되었던 기억이 다시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길이 기억을 품고 있다 다시 돌려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굴대굴 2026-09-19 14:0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아무 생각 없다가도 갑자기 달려드는 기억 때문에 놀랄 때가 종종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비스업의 영역은 밑바닥에 자리 잡았다.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고 굽신거리는 일. ‘손님은 왕이다’란 문구를 널리 퍼뜨린 업종. 90년대 어느 시점, 친구와 농담 삼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고객으로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버르장머리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건 다 백화점 때문이라고. 지금이야 그때와 다르지만, 무조건 손님이 옳다는 서비스 마인드가 최우선이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와 다른 건 이뿐만이 아니다. 서비스업의 영역은 이제 업종을 가리지 않고 위아래 총망라해서 펼쳐진 상태다. 변리사, 변호사, 세무사 등 법과 관련된 직업부터 의사에 이르기까지. 경쟁과 생존을 위해 많은 직업이 서비스업을 자신에게 이식시켜야만 했다.


시대가 바뀌고 흐름이 바뀌면 그에 맞춰 변화를 가져가는 게 맞다. 그럼 정치는 어떨까? 존재하는 많은 나라가 엄청난 구조적 모순을 떠안고 있다. 그 모순을 해결하려면 결단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누구도 오래 기다릴 생각이 없다.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정책은 모호하고 뜬구름 잡는데다 제대로 될 거라는 확신도 없다. 게다가 정책의 주체가 하필이면 그 모순에 기대 꿀을 빨거나, 모순을 외면하던 세대다. 이러니 어떤 정치인,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든 일관성은 말할 것도 없고 추진력도 얻기 힘들다. 효과가 빠르고 명확한 정책은 포퓰리즘으로 인식되거나, 아니면 특정 계층, 부류, 직업군에만 혜택을 준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이념이나 신념만으로 정치를 하는 시대는 아주 완전히 끝장이 난 거 같다. 트럼프가 괜히 두 번이나 대통령이 된 게 아니었다. 정치인도 이제 서비스업 종사자다. 소비자의 취향과 변화를 빨리 잡아내고 원하는 바를 즉각 제공하면서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소비자의 지갑을 열 듯 유권자의 마음을 가져가야 한다.


그런데 이 글은 현실일까? 조롱일까? 원래는 ‘정치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 듯하다’라는 관점에서 출발했는데 쓰다 보니 모르겠다.


“안 할 거야? 어? 안 할 거야? 어? 안 할 거야? 어? 어? 어? 어? 어버버버. 어버버버.”


꼬리말1) 최근 가장 많이 본 쇼츠는 과거 코미디빅리그에 나왔던 조수봉 캐릭터. 글의 마지막은 버퍼링 걸린 조수봉이다. 쇼츠를 보며 한참을 웃었는데 이 글을 이렇게라도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꼬리말2) 이 글은 한참을 묵혔다. 쓰다 보니 조롱처럼 느껴졌고,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조롱하는가란 의문을 떠올렸지만 그 대상을 특정할 수 없었다. 정치인, 유권자, 시대, 세대. 어쩌면 싸잡아서 욕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는 건 그저 배설의 욕구를 해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멈춰 서서. 더 살피고. 더 생각하기. 그러니까 지금은 마지막 인용부호 안의 문장들과 두 개의 꼬리말만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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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은 출근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한다. 새벽 5시. 여느 때처럼 부스스 일어나서 고양이 화장실 치우고, 고양이 빗질한 후 고양이 간식을 준다. 바깥이 짙은 어둠은 아니지만 이젠 제법 어두워서 불을 켠다. 얼마 전만 해도 불을 켤 필요가 없었는데. 고양이 관련 업무를 마치고 커피에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고서 세수. 아, 일하러 가기 싫다. 일주일 내내 일하다가 주 5일 일하고, 이제 이틀만 일하는데 이것도 하기 싫어진다. 조만간 놀겠구나. 곧 일어나기도 싫어서 무덤 파고 들어갈 생각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일하기도 귀찮은 판에 당장 집 청소를 시작해야 한다. 돌돌이로 마루를 밀다가 욱해서 고개를 번쩍 든다. 고양이 녀석 털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매일 청소할 필요 없는데! 지금 고양이는 캣타워 아크릴 해먹에 들어가 자는 둥 마는 둥 나를 살피고 있다. 한 다리 바깥에 척 걸치고서. 건방진 저 녀석이 털 청소만 해줘도 내가 이렇게 매일 청소할 필요 없는데! 에잇! 불을 탁 끄고 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획 돌아선다.


응? 처음엔 식탁 위 불이 켜져 있는 줄 알았다. 밝은 베이지 계열 벽지가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변에 무드등이나 백열전구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분위기다. 뒤를 돌아봤다. 홀린 듯 걸어 베란다 창 앞에 서서 한참을 쳐다봤다. 이런 강렬한 이미지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핸드폰을 가지고 오다가 시야에 들어온 건방진 고양이. 야야, 봐라 봐, 태양도 열 받아서 불을 뿜잖아. 하는 일도 없으면서 허구한 날 얼쩡대다가 비만 뿌린다고 구름한테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모양이네. 활활 타겠다, 타겠어. 고양이는 ‘그래, 짖어라, 짖어’ 뭐, 그런 느낌. 내 경우는 뜬금없이, 수시로 욕받이로 등장하는 강아지 탓에 고양이랑 함께 개도 입양했던가, 하는 그런 느낌. 내가 또 진 거 같은 느낌에 얼른 옷 갈아입고 빠이빠이 손 흔들고 집을 나선다.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나서는데 뜻밖의 환대에 놀라 얼른 뒷걸음질 친다. 비가 온다고? 비가 내린다. 땅바닥이 빗방울의 파편으로 점점 색이 진해지고 있었다. 불구덩이 같던 사진을 찍은 게 10분이나 됐을까 싶은데. 아니, 이 양반이 아까는 얼굴을 그렇게 붉히며 야단법석이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이래? 무슨 가스레인지 불이야? 스위치 돌리면 바로 꺼지게? 속으로 꿍얼대며 우산을 꺼내다 조금 전 열심히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고 나온 내 모습이 떠오른다. 흠. 까만색 우산이 머리 위로 펼쳐진다. 우산을 다른 색깔로 바꾸든지 해야겠어. 지체된 발걸음을 서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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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덥다. 습도는 어제보다 덜하지만 뜨거움은 오늘이 더 심하다. 요즘 산길은 강아지풀 기세가 등등하다. 부숭부숭한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길 양옆에 도열한 채 들썩들썩한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때마침 힙합이라도 흘러나오면 건들건들 리듬을 타는 힙합 소년들처럼 보인다. 귀엽구나. 그래, 강아지풀은 귀엽기라도 하지. 이름 모를 수많은 수풀은 여름을 등에 업고 내 어깨높이까지 자라서 맞짱을 뜨려 한다. 어이, 아저씨, 어딜 지나가려고? 이봐, 아저씨, 여기 지나가려거든 날 밟고 가야 할 걸? 길바닥에 드러눕다시피 한 풀을 피해 다리를 높이 드는데 메뚜깃과 곤충 한 마리가 내 손을 징검다리 삼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건너간다. 실례. 엉겁결에 발판 신세가 된 억울함에 버럭 화를 내본다. 이 자슥이!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이번엔 갑자기 등장한 참새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 날아간 것도 아니고 내 앞길을 막고 총총 뛰어서. 마지막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본 거 같다. 실례. 느닷없는 등장에 소스라쳐 놀랐다가 욱해서 외친다. 아니, 이것들이!


집에서 고양이한테 무시당하니 이젠 산에 와서도 온갖 무시를 당한다며, 근거 없는 불만을 가득 품고 산에 오른다. 바위 무더기들을 낑낑거리며 오르다 잠시 쉬는데 말벌 한 마리가 주위를 빙빙 돈다. 피하는 게 상책이다. 조금 더 위에 올라가서 쉬자. 하지만 벌이 쫓아왔다. 아, 좀 쉬자고! 에잇, 더러워서. 간다, 가! 천년만년 여기서 썩을 때까지 잘 살아라! 무병장수하란 덕담을 퍼붓고 악에 받쳐 꼭대기에 도달하자, 성벽 구멍에 앉아서 이쪽을 살피던 모지리가 툭 튀어나와 내 쪽으로 온다. 모지리, 네가 웬일이냐? 나를 단번에 알아보고. 헤벌쭉. 불만 같은 거, 악 같은 거 금방 잊는다. 남자는 나이 들면 애가 된다던데. 갈수록 단순해지는 거 같다는 생각을 얼른 성벽 너머로 날려버린다.


닭가슴살과 간식 먹고 배부른 고양이와 단순명료해진 아저씨가 산 정상에 함께 있다. 모지리는 식곤증으로 나른해져 성벽 구멍에서 잘 채비하고, 아저씨는 그 구멍들을 통해 불어 들어오는 바람으로 땀을 식힌다. 몸을 돌려가며 땀을 식히는데 바싹 시든 나뭇잎 하나가 공중에서 바람개비처럼 돌며 부유하는 게 보인다. 휙휙휙. 완벽한 회전이다. 한들한들. 흠잡을 데 없는 가벼움이다. 사뿐.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착지다. 10점! 무언가 이룬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게 여유였던가? 착잡함이 한여름 태풍처럼 짧고 강하게 할퀴고 지나간다. 모지리와 눈인사를 나누고 발걸음을 돌린다.


하산하는 길. 부쩍 늘어난 잠자리 중 한 마리가 길 앞을 막아선다. 왜? 왜 쳐다보는데? 한참을 눈싸움 벌이다 잠자리가 날아간다. 나도 모르게 곤충과 눈싸움하고 나서 순간 뻘쭘해져 한 소리 한다. 저 자슥이! 눈알 많다고 자랑하냐! 좋겠다, 눈깔 많아서! 마음의 여유는 무언가 이루는 것과 상관없는 모양이다.


꼬리말) 8월 26일에 썼던 글. 지금은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는 중. 웃자란 풀들도 다 잘라내고 가지치기한 탓에 건들거리던 강아지풀은 어느 순간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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