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가슴살 4개를 품고 오늘도 산에 오른다. 벚꽃은 이미 졌다. 나무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늘어서듯이 쭉 서 있어서 한 번은 꼭 돌아보게 했는데. 꽃이 사라진 나무는 내겐 그저 모호할 뿐이다. 언젠가부터 산을 오르는 외국인들도 많아졌다. 얼마 전엔 산꼭대기에서 영어로 습격을 당해서 기겁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알아들어서 손가락을 사용해 요래 요래 가라고 알려주긴 했지만…. 흑, 산에서 영어를 만나다니. 조만간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는 상상도 해 본다.


참, 그러고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 3마리. 모두를 한꺼번에 보는 건 쉽지 않은데 운 좋게 다들 만난 적이 있었다. 거의 두 달 만이었던가? 그런데 고등어 줄무늬를 가진 한 녀석이 다른 둘보다 체격이 작았다. 원래는 비슷했었는데. 셋 중 가장 소심한 녀석이라 먹을 거를 가장 적게 얻어먹은 걸까? 그럼, 저 빵빵한 배는? 임신이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인데, 내가 알던 고등어는 분명 수컷이었거든. 배에 물이라도 찬 거라면, 이런 환경에선 결말은 뻔하다.


그날 본 후로, 고등어는 열흘 가까이 보지 못했다.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닭가슴살도 반만 먹고 눈치를 보던 모습.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려 오늘도 정상 부근을 기웃거려 보지만 고등어는 안 보인다. 삼색이에게 닭가슴살 3개, 젖소에게 1개 삥 뜯기고 발길을 돌린다. 활기찬 이 두 녀석은 자신들 주변에 드리워진 그림자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 언제나 삶의 주변을 기웃거리는 그 무엇 따윈.


내려오는 길. 아쉬움에 미적대며 주위를 살피는데 특이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나뭇잎은 가지 쪽에서 자라나야 하는데 이 나무는 어째 밑동부터 나무 전체에 걸쳐 잎이 나 있다.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봤더니 죽은 나무를 덩굴 식물이 감고 올라간 상태더라. 아이고, 억척스러워라. 죽음마저 휘감고 피어나는 생명이라니. 그래, 그러니 잘 있을 거야. 잘 있으면 언젠가 보겠지. 사람이 적었던 어떤 겨울날, 햇살 아래 수풀 속에서 장난치던 셋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을 기약한다.


꼬리말) 426일에 썼던 글이다. 계절감이나 시기가 명확한 글은 바로 올리는데 이 글은 놓쳤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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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5-1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고양이들의 숙명이 참 안타깝습니다. 작년 가을까지 산 방향으로 자전거 타고 가면 만나 캔이라도 하나 주던 치즈와 젓소도 겨울이 지나고는 보이지 않더군요.

대굴대굴 2026-05-17 11:46   좋아요 0 | URL
겨울 나는 게 가장 어렵다고들 하더라구요. 어떻게 가든 최소한 사계절 세상 구경은 하고 갔으면 해요.
 

난 고양이를 싫어했다. 어렸을 때 경험이 한몫했다. 키우고 있던 노란 병아리를 도둑고양이가 물어 갔거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머리만 달랑 떼어낸 몸뚱이를 대문 위에 올려놓고 사라졌다. 그걸 하필이면 또 내가 발견했고. 피가 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 선명하던 노란색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거부감은 30대까지 이어졌다. 삶에 치를 떨던 시절, 길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녀석들의 눈은 나를 기겁하게 했다. 묘한 색깔을 바탕으로 해서 세로로 쭉 그어진 검은 동공. 그 눈과 마주치면 마치 내 안의 모든 것들이 낱낱이 드러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진 알겠지만, 하필 왜 고양이의 눈을 통해서였는진 지금도 모르겠다. 우주의 갈라진 틈을 떠올렸던 걸까?


고양이에 대한 이미지가 변한 건 30대 후반부터다. 사회적으로 길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했고, 무엇보다 내 태도가 고양이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었다. 경계하고 거리를 두고 영역이 있지만, 마음을 열면 한없이 마음을 쓴다. 고양이를 기를까 생각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펫샵에서 사들일 생각을 할 정도로 당시 내 인식은 아주 구식이었다. 오히려 다행이었지 뭐.


지금은 고양이와 함께 산다. 무슨 이유인지 코로나가 한창일 때 생후 2개월의 나이에 버려진 품종묘. 버려졌다는 걸 제외하면 나머지는 추정이다. SNS를 통해, 지자체가 만들어놓은 정식 루트를 통해 주인을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내게 입양됐다. 입양 첫날, 밥솥 뒤에 숨은 걸 찾지 못해서 30분을 넘게 집안을 뒤졌을 정도로 조그맣던 녀석. 에잇, 내다 버린 사람이 있다면 넘어지면서 개똥에 코나 박아 버려라!


아직도 여전히, 고양이의 눈은 내게 신비롭다. 우주가 담겨있고, 누군가의 양심이며, 날카로운 관찰자다. 내 마음속의 고양이다. 무겁고, 무섭고, 무시무시하게 균형 잡힌 존재. 하지만 내 곁엔 현실의 고양이도 있다. 가볍고, 가소롭고, 가당치 않게 자신감 넘치는 존재. 이 아이는 나만을 담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며, 나만 바라본다. 역시 존재란 그 무게감을 예측하는 게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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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6-05-1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대굴대굴님 댁 러시안블루 고양이 이름이 무엇일까요?^^
무척 귀여워서요~
저도 고양이 좋아하는데요 올려주시는 글들이 참 좋습니다.^^

대굴대굴 2026-05-14 09:13   좋아요 1 | URL
저희 집 아이는 ‘월‘이에요. 9월에 발견돼서 구월이라 불렸는데 제가 귀찮은 나머지 ‘구‘자만 날렸어요;;
자주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appletreeje 2026-05-14 09:17   좋아요 0 | URL
아~ 월이군요! 이쁩니다~ 월이도 구월이도요~
좋은 하루 보내십시요!

대굴대굴 2026-05-14 09:20   좋아요 1 | URL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잉크냄새 2026-05-1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흔이 넘어서 기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13살된 노령묘와 몇 년 전 길거리에서 간택된 혈기방자한? 5살짜리랑 살아갑니다. ㅎㅎ

대굴대굴 2026-05-14 19:56   좋아요 0 | URL
둘씩이나! 전 이 녀석 하나도 버겁습니다^^ 얘도 5살이에요.
 

뉴스를 봤다. 행복이 비극으로 전환되는 순간. 알 수 없는 그 찰나의 순간이 이후 도래할 모든 시간을 뒤덮는다는 게... 하아. 떠난 자도 안타깝지만 남은 자들은 어찌해야 하나? 어떤 위로도 소용없고, 시간이 허용하는 한 그 순간을 돌이키며 피눈물을 삼킬 텐데. 삶이 이렇게 잔인해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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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민음 한국사 : 18세기, 왕의 귀환 - 조선 4 민음 한국사 4
김백철 외 지음, 강응천.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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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의 장점 중 하나는 동시대의 서양사를 짧게나마 정리해 준다는 점이다. 내가 요약해도 되겠지만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18세기 세계의 흐름을 살펴보자.


=== 모든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인식은 신의 이름 아래 굴종을 강요당하던 시민계급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었고, 이는 프랑스대혁명으로 폭발했다. 시민계급을 포함한 대중은 절대왕정에서 사제와 귀족에 이은 제3신분으로 불렸다. 이 미천한 제3신분은 시에예스의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과 함께 카페에서 거리로 뛰쳐나갔다. “제3신분은 무엇인가? 전부이다. 제3신분은 지금의 정치 질서에서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제3신분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무언가가 되고자 한다!” (본문 중) ===


=== 서유럽이 상업적 이윤을 좇아 아시아 대륙 곳곳을 식민지로 삼아 나가는 역사적 과정을 ‘서세동점’이라 한다. 18세기에 밝게 빛나고 있던 서유럽의 뒤안길에는 노예무역과 서세동점이라는 어둡고 처참한 아비규환이 있었다. 이제 지구상에서 서유럽의 발길에 유린되지 않은 지역은 오스만튀르크제국이 버틴 이슬람 세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뿐이었다. (본문 중) ===


=== 앞뒤 맥락 없이 18세기만 놓고 보면 국력의 크기나 문화의 성숙도에서 동아시아는 서유럽을 능가한다. 그러나 19세기에 서유럽은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완성하고 절정의 문학예술을 꽃피우며 전 세계의 지배자로 우뚝 선 반면, 동아시아는 이전 세기에 세계의 다른 지역이 겪었던 식민지의 길을 더 비참한 모습으로 답습한다. (본문 중) ===


마지막 인용은 질문이기도 하다. 조선은 왜 영조와 정조에 이르는 76년간의 개혁과 발전을 뒤로 한 채 비참하게 무너져 내렸을까?


책의 제목이 ‘왕의 귀환’이기도 하니, 우선 영조부터 살펴보자. 역사책이나 드라마를 통해 흔히 접하는 부분은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긴 재위 기간(52년), 탕평책, 균역법, 사도세자(영조의 아들) 등이다. 극적인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는 게 사도세자 관련 문제겠지만 공교롭게도 영조의 정치적인 면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들이 현재의 정국을 헤쳐 나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판단, 살려두었다간 분쟁의 씨앗이 되어 세손마저 위험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 어떤 행위를 했을 때 특정 분파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다는 판단. 이런 정치적 판단을 근거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세자시킨 후 뒤주 속에 그냥 방치한다. 그가 자신의 위치를 얼마나 처절하게 파악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균역법 시행 과정을 통해서 다른 면모를 살피는 것도 가능하다. 균역법은 17세기 대동법에 이어 세제 개혁을 끌어낸 주요 정책 중 하나다. 대동법 시행이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균역법 역시 그랬다. 이해당사자인 양반이 개혁의 주체이자 대상이었던데다 중앙 재정에 막대한 지분을 가진 분야였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필요성은 조선 전체가 공감했지만, 실행 여부가 난관을 거듭하자 영조는 독단적인 결단을 내린다. 양민(평민)들의 세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후, 자신은 대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 역할이고 그에 따라 해법을 모색하는 것은 탕평 관료의 몫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니까, ‘일 제대로 안 해? 너희만 세금 안 내겠다고 버티면 왕이고 양반이고 나발이고 다 죽는 거야!’라고 협박한 셈이다. 그 결과, 균역법이 시행되고 양반들도 세금 체계 안에 포함된다. 당시 왕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영조란 인물이 관료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물론 독재자의 측면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 “백성을 위해 군주가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임금의 자리에 있어도 독부(獨夫)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 중) ===


다행히 영조는 깨어있는 군주였다. 또한 앞서 보았지만, 말만 앞서는 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개천 바닥을 파내는 준설 작업과 주변 정비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도시 빈민들의 삶을 보살폈고, 상업 발달의 흐름을 알아채고 상인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붕당을 억제하고 백성을 바라본 52년의 긴 재위 기간. 그것은 조선으로선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리고 1776년, 숱한 시련을 극복하고 드디어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 반면 일체의 사정을 배제하고 공의에 준거하고자 했던 정조는 의리론을 둘러싸고 각 정파의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러한 대립과 갈등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서 공론 대결에 의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한 것이다. (본문 중) ===


정조는 영조와 결이 다른 왕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은 같다. 규장각을 세워 젊은 학자들을 관료로 키워내고, 장용영을 만들어 무예가 뛰어난 군관들을 배출했다. 그들이 문무 관료로 자리 잡으면서 정조는 자연스럽게 정국을 장악했다. 그 장악력을 바탕으로 정조의 탕평책은 훨씬 범위가 넓어졌다. 다시 말해 사용할 수 있는 인재의 범위가 풍부해졌다. 문장으론 몇 문장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붕당이 대립하던 시기에 상당한 정치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일들을 정조는 재위 기간에 꾸준히 해 나간다. 최근 10여 년 우리 정치에 부족했던 점들, 즉 갈등과 충돌을 조절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을 조장한다는 것과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정조는 해냈다. 그것도 억압이나 권력이 아닌 정치력으로. 다른 어떤 실질적인 업적보다 정조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쯤에서 왕을 떠나 당시 사회 분위기를 살짝 요약해 보겠다. 책의 문장을 조금 바꿔본다면, 18세기 조선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청을 등한시하던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북학’이란 이름으로 청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흐름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처음엔 교리 연구 중심이었지만 최초의 세례자가 나왔고, 양반에서 하층 계급까지 영향력이 확산한다. 상공업의 발달로 17세기부터 진행되었던 신분의 분화는 그 양상이 더욱 다양해지는 중이었다. 과거엔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문학 활동에 중인과 하층 계급까지 참여함으로써 신분 상승 욕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광대들 역시 궁중이나 높으신 분들 앞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장터로, 바다로, 농경지로 민간의 수요가 있는 곳을 찾아 움직였으며 독자적인 영리활동을 시작했다. 이처럼 조선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꿈틀대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은 왜 18세기의 흐름을 살리지 못하고 다가오는 세기에 그토록 무너져 내렸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정조의 죽음 때문. 정조가 죽고 즉위한 순조의 나이는 11살.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신료들을 장악하면서 정국을 이끌어가던 영조, 정조와 달리 순조는 그럴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대리청정이 이루어졌으나 곧 권력 싸움으로 변했고 세도 정치의 시대로 넘어간다. 왕권을 강화했던 모든 조치가 되돌려졌고, 탕평은 무너졌으며, 인재들도 쫓겨났다. 개혁은 그렇게 무너졌다. 이런 이유로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이란 가정이 꾸준히 등장하는 것일 테다. 다른 이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서유럽과 미국이 19세기에 강자로 등장한 원인 중 하나는 과학 기술을 산업화에 적극적으로 적용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정조는 기술을 우대했지만 어디까지나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접근했다. 이 방향성의 차이가 두 세계의 극명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 정조가 가다가 멈춘 지점, 정조가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 지점에서 조선은 급속히 쇠락의 징후를 드러냈다. (본문 중) ===


영조와 정조는 분명 뛰어난 군주였다. 그들의 업적 뒤에는 시대와 변화를 읽어낸 두 왕의 날카로운 안목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선이란 공간은 여전히 주자학의 공간이었다. 이질적인 것들이 자생적으로 꿈틀거리고, 외부에서도 억지로 밀고 들어왔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던 시대. 조선 후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정조는 그와 같은 시대의 흐름을 간파했지만, 단 한 발짝도 앞서 나가지 못했다. 그들이 부족해서가 아닌, 그것이 인간이 갖는 한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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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없다. 예전엔 안 그랬었는데 언젠가부터 햇볕이 없는 날엔 우울해진다. 20대엔 이런 날씨를 오히려 좋아했다. 난 어둠의 아이야. 그런 낯간지러운 생각도 했던 거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객기 같아서 픽 웃게 하지만, 그 객기 또한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일부분이라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이런 날은 나만 우울한 게 아니다. 햇볕을 좋아하는 고양이 역시 축 늘어지기 일쑤다. 괜히 힘이 없고 오갈 데 없어 보인다. 흑임자 인절미처럼 바닥에 촤악 퍼져 있다. 맹수라며 객기를 부리던 녀석인데 이럴 때 보면 하찮기 그지없다. 녀석이 흑임자 인절미라면 나는 뭐가 되면 좋을까? 그런데 하필 그 타이밍에 고양이의 하얀 각질이 눈에 들어온다. 건조해서 올라온, 검은 털 위에 하얀 가루 같은. 불현듯 떠오르는 한 가지. 콩고물. 인절미엔 콩고물이지. 고양이가 인절미면 집사는 콩고물이지.


...

갑자기 더 우울해지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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