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류 -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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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5년 대만.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에 밀려 넓은 중국 땅덩어리에서 타이완으로 건너온 49년 이래 계엄령이 유지되던 나라. 이곳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할아버지 예준린은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거쳐 국민당 소속으로 공산당과 싸웠고, 국민당을 따라 타이완에서 삶을 꾸렸다. 자식은 모두 4명으로 10살 전후해서 예준린과 함께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큰아들인 밍후이는 대학을 나와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둘째인 위우원은 고등학교 졸업 후 먼바다를 돌아다니는 선원이 되었다. 셋째인 밍첸은 허풍이 세고 약삭빠른 인물로 별다른 직업이 없고, 넷째인 샤오메이(딸)는 대학을 나와 출판사 편집장이 되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주인공인 예치우성이 있다. 예준린의 유일한 손자이고 밍후이의 아들이며, 현재 고등학생이다. 이 가족들에게 75년에 두 개의 커다란 사건이 터진다. 먼저 수십 년간 국민당의 총통이었던 장제스가 이 해 사망한다.


“누구에게든 국민당은 빛나는 정의였고 공산당은 섬멸해야만 하는 악이었다. 그래서 나는 상당히 클 때까지 마오쩌둥의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생각했다.” - <류> page 20


이 문장을 여기에 인용한 이유는 딱 하나다. 대한민국에서 1980년 이전에 태어나 반공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은 저 문장만으로 대만의 사회 분위기가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추측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대만의 이야기지만 나에겐 전혀 낯설지 않았다. 국민학교 미술 시간에 반공 포스터를 그릴 때면 김일성 머리에 도깨비 뿔을 그리던 시기를 보냈으니까. 냉전으로 인한 정치 사회적 긴장감만 익숙한 게 아니다.


“도로는 쓰레기투성이였고 공기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쉰 냄새가 났다.” - <류> page 295

“여동생이 안전핀으로 뚫어준 피어스 구멍이 곪아버린 것이다.” - <류> page 297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나오는 사소한 일상들 역시 내가 크면서 겪고 들었던 것들이다. 손님을 속이는 택시 운전사, 버스 뒷자리에 앉아 있으면 놀이기구를 탄 듯 들썩여야만 했던 난폭 운전, B형 간염의 유행, 학생 시절 아이들을 휩쓸었던 분신사바 등등. 문화 차이에서 오는 근본적 개념을 제외한다면, 현상에 대한 반응과 그로 인한 결과물은 우리와 놀랍도록 닮아서 신기할 정도다. 결과적으로 이런 점이 대만이란 낯선 시공간에 대한 거리감을 확 줄여준 채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지 않나 싶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장제스의 사망이 국가적인 충격이었다면, 얼마 후 이 가족에게도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할아버지 예준린이 가게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된 것이다. 예준린은 전쟁의 한복판을 지나온 인물이라 소싯적 중국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항일이라는 명목으로, 공산당이라는 이유로 그랬다. 때론 그 혼란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나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공산당도 국민당도 하는 짓은 같아. 다른 마을에 마구 쳐들어가 돈과 먹을거리를 빼앗았지. 그렇게 백성들을 먹어 치우며 같은 일을 되풀이했어. 전쟁이란 그런 거야.” - <류> page 25


천벌을 받은 걸까? 그렇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삶을 살아오긴 했다. 하지만 내 가족이 살해당하는 일을 겪는다면 이후의 내 삶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이 사건은 예치우성의 삶에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끊임없이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면서 영향을 준다. 사랑을 속삭이다가도, 친구와 객기를 부리다가도, 이별의 아픔에 빠졌을 때도 할아버지의 사건은 그의 주위를 맴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지. 모르는 일은 모르는 법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지. 그래도 꾹 참으면 그 사건은 언젠가 우리 안에서 통증을 날리고 복구할 수 없는 상태로 묻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지키는 비취 같은 보석이 된다. 그렇지, 할아버지?” - <류> page 116


소설은 예치우성을 중심으로 얼추 대만의 90년대까지 훑는다. 예치우성은 그 기간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사랑에 빠지고, 우정을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다 군대로 도망치고,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의 아픔에 허우적대다가 다른 사랑을 만난다. 귀신에 도깨비불도 나오고, 조폭에 살인, (어쩌면) 막장 가족사까지 온갖 것들이 예치우성과 함께 흘러간다. 그러다 마주치게 된 진실 앞에서 예치우성은 생각한다.


“어느 쪽으로 가야 좋은지는 죽을 때까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단호하게 마음을 거절하다 보면 우리는 더는 우리가 아니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되어 간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10년분만큼 걸어왔다. ... 만나고 헤어지고 타협하고 포기하는 걸 배웠다. 그것은 그것대로 어른이 되는 과정이었는데 더는 마음을 내버려두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 <류> page 407


바로 앞선 인용문과 결이 살짝 다르다. 외면하거나 피하거나 순순히 받아들이거나 하는 것만이 삶은 아닐 것이다. 직시하고 부딪쳐서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을 내고 나아가는 것 또한 삶의 한 방식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모른다. 어쩌면 애초에 옳고 그름 자체에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예치우성은 그렇게 삶의 방향을 틀어 다시 한 걸음을 뗀다. 할아버지의 살인자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둘러친 보호막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아주 옛날, 할아버지는 그 모제르 권총으로 사람을 잔뜩 죽이고 대만으로 가져와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그걸 XXX XX이 중국으로 가지고 돌아갔고, 결국 그 총은 내게, 할아버지의 보물이었던 내게 불을 뿜었다.” - <류> page 469


결국 이 소설을 짧게 요약하면, 위 인용문과 같다. 장르로 말하자면, 역사 소설이자 성장 소설일 것이고, 앞서 말했듯이 온갖 것들이 소재로 잔뜩 등장해서 잡탕처럼 어우러져 있다. 다행인 건 난잡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거. 그래서 균형이 잡힌 탓인지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교훈적이지도 않다. 예치우성은 한 걸음을 떼었지만 그것이 삶의 반전을, 나아가 완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는 할아버지의 사건을 해결하고 결혼을 한 후에도 계속 자신을 위한 외피를 두르고 산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만, 이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멈추고 다음 이야기는 끌어오지 말자고. 이 순간의 행복을 더럽히지 말자고. 삶은 모질게 이어지지만 누구나 순간의 행복을 즐길 자격은 있는 법이다.


꼬리말) 이 글의 제목은 page 89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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