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사소했다. 고양이 장난감 중에 털로 짜서 만든 캣닢볼이 있다. 공 모양에 고양이 얼굴 크기 정도고 털실을 뭉쳐놨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의 말캉함을 지녔다. 고양이와 놀아주다가 이 볼을 고양이 쪽으로 굴렸는데, 이 녀석 피할 생각 없이 멀뚱히 보고 있다가 얼굴에 정면으로 맞았다. 물컹하다고 해도 부피가 있으니, 녀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충격보단 놀라움이 더 컸겠지만. 그 즉시 숨숨집으로 달려가더니 콕 박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쫄보 녀석 같으니.


이 사소한 일상에 평소 하던 생각이 들러붙었다. 고양이와 함께하면서 밤의 일상이 완전한 평온함으로 가라앉았다는 내 평소 생각. 세상에, 이런 쫄보 덕에? 그러니까 그 평온은 어떤 물리력이나 권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고양이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외로움이 끌려 나왔다. 내가 외로움을 탔던가? 그 틈을 고양이가 채워준 건가? 꼬리를 물던 의문은 어떤 의문에 도달하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고양이가 부재하면, 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나?


새벽에 고양이에게 간식을 주려고 잠에서 깼다. 식탁 위쪽 불을 켜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거실 쪽 베란다 창에 식탁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4인용 식탁이지만 벽에 붙여놓은 관계로 2인용 식탁이 되어 버렸고, 각종 잡동사니를 올려놓아서 실제론 나 혼자 쓰기에 딱 적당한 공간만 남은 식탁. 어쩌면 내 생활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그 후로 며칠 동안 첫날의 오싹함까진 아니지만, 창에 투영된 이 모습을 볼 때마다 꺼림직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어떤 날의 비슷한 시각. 부스스 일어나서 다용도실에 있는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몸을 일으키다가 창밖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가로등 불빛 아래 주차된 자동차 하나. 주변의 어둠으로 인해 그 존재감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처음엔 빛 때문에 차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았고, 눈을 한참 깜빡이고 나서야 모든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20년을 넘게 봐온, 별다를 것 없는 익숙한 공간. 그런데도 잠깐의 낯섦이 그 공간을 아주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게 했었다. 낯섦이라. 공간은 그대로인데 빛과 어둠과 내 시력만으로 그 공간을 왜곡 해석한 것을 낯섦이라 할 수 있나?


마루로 나와 베란다 창을 바라봤다. 식탁은 여전히 창에 선명히 맺혀있었다. 하얀색 식탁과 파스텔톤 의자와 식탁 위에 놓인 다양한 색깔의 잡동사니들. 하지만 창에 맺힌 그것들은 모두 식탁 위 조명색인 주황색 한 가지로 뭉뚱그려진 채 현실감을 상실하고서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저 창, 스크린 역할을 하는 저 창은 새벽에 선선해지면서 최근에야 ‘다시’ 닫기 시작했다. 그 얘기는 4~5개월 전에 이와 똑같은 장면을 분명 오랜 기간 봐왔을 거라는 의미다. 고작 4~5개월이 나에게 낯섦을 선사한 것이었던가? 그런 걸 낯섦이라고 해도 되나? 식탁 위 조명이 애초에 주황색이 아닌 하얀 형광등 불빛이었다면, 저 반사된 장면이 내게 어떤 인상이라도 남겼을까? 내 인식과 감정의 흐름이 고양이와 한밤의 평온을 거쳐 외로움으로 지나가지 않았다면, 일련의 상황이 일어나기나 했을까?


‘나’라는 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 틀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불명확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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