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님은 두 분 모두 1920년대생이다. 큰누나는 50년대, 누나는 60년대, 나는 70년대에 태어났다. 부모님과 세대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식끼리도 세대 차이가 있다. 큰누나는 어린 시절을 다른 곳에서 보냈지만, 누나와 나는 어머니의 극진한 보호 속에서 컸다. 과보호의 피해는 이후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갔지만, 누나의 타격이 가장 컸다고 해야겠다. 나는 누나를 반면교사 삼았으나 누나는 그럴 대상조차 없어서 몸소 부딪히고 깨져야 했으니까. 큰누나는 일찍 결혼해서 출가한 탓에 그 혼돈을 직접 겪진 않았다. 그래도 웬만한 과정을 다 듣거나 지켜봤고,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니 큰누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큰누나는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자식들에게 똑같이 집착했다. 특히 아들에게. 세부적인 사건·사고는 달랐지만, 어머니와 누나와 내가 휩쓸렸던 혼란에 큰누나 역시 휩쓸리고 말았다. 달랐던 점이라면, 내가 빠진 혼란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마무리됐고, 큰누나의 혼란은 큰누나가 직접 선을 그으면서 정돈했다는 거. 큰누나가 한 성격 하거든. 다만 뒤에 남은 서운함은 부모 처지에서든, 자식 처지에서든 어쩔 수 없는 일.


우린 살면서 항상 어딘가로 향한다. 가다가 가다가 계속 갈 수도 있고, 흠칫 놀라 되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되돌아왔다고 해서 그 자리가 처음과 같은 자리일 리도 없다. 어떤 경험을 했다면 사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고 변했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변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 희한하게도 우린 같은 방향으로 다시 전진하고 또 흠칫 놀라 돌아온다. 당사자가 이 모양인데 그걸 지켜본 타인이 다 알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건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린 살면서 항상 어딘가로 향한다. 삶의 굵직한 방향성을 따라 어떤 대로를 따라 걷다가 벽에 부딪혀 다른 길로 되돌아와서 멈춰 선다. 잠시 망설이다 다시 비슷한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하지만 이전에 갔던 길은 아니다. 우리 발자국은 언제나 한 방향만 향한다. 삶의 모든 길은 일방통행일지도 모르겠다.


꼬리말) 글의 제목이 AI가 내놓은 문장이다. 듣자마자 ‘함흥차사’가 떠올랐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고, 다음엔 다소 추상적인 이미지의 ‘길’을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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