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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책 한권을 이렇게 오랜 시간 읽은적이 있었던가? 텍스트를 읽어 내려감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리뷰를 쓰려하니 써지지 않아 몇일을 이러고 있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의도는 작가의 글을 통해 이미 읽었음에도 내 평범한 범주안에 그들의 '덩.어.리'된 이야기를 풀어낼 수가 없다. 『은교』속 사랑이 그렇게 다가왔었고, 『소금』속 사랑도 그렇게 다가왔건만,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있는 『소소한 풍경』의 사랑은 또 다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다. 괴기스럽다 여겼던 책표지가 끝장을 넘기면서 분명 이해가 되었다 생각을 했지만, 그 역시 머릿속 이해일 뿐 그들에게 완전히 녹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영영 그들의 '덩.어.리'로서의 표현을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p.11)라는 강한 문장으로 프롤로그가 시작된다. 과거의 데스마스크야 기록과 그리움의 차원이었지만, 현대의 데스마스크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뿐인가? 재료가 시멘트라니 '데스마스크'의 목적보다는 매장이나 음폐의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소설 속 '나'는 자신을 닮은 듯한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로 인해 귓속 곰팡이의 움직임을 느낀다. '데스마스크'가 귓구멍 속의 곰팡이들을 깨운 게 틀림없다고, 작가로서의 감수성의 게이지가 비등한 순간이었다고 이야기를 한다. '나'라고 되어있지만, 화자는 아닌 '나'. '"소소한 풍경'의 화자는 ㄱ이다. ㄴ과 ㄷ의 이야기를 화자인 ㄱ에게서 듣는다'(p.9) 라고 작품 속 '나'가 아니, 작가는 이야기를 한다. 인물들의 이름에 익숙해 있었던터라 처음은 어색하게 다가오지만, 프롤로그가 끝나기 전에 ㄱ,ㄴ,ㄷ이라는 인물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것을 보면, 작가의 말대로 독자의 동의가 필요 없는, 작가 생활의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내공에 독자라는 이름에 나는 10페이도 안되는 글밥들 속에서 작가에게 이미 굴복하고 말았나 보다.
한 여자가 있다. 푸릇한 나이에 결혼을 한 후, 이상 속 결혼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혼자가 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이야기 한다. '혼자 사니 참 좋아'라고 말이다. 여자의 기억 속 흰 손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은 흰 운동화를 신은 남자 1의 존재로 인해 기억에서 밀려나지만, 사라진것은 아니었다. 남자 1을 떼어버리고 소소로 온 여자에게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또 다른 남자 ㄱ. 남자 1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 "둘이 사니 더 좋네!". 그 둘앞에 나타난 파릇한 조선족 처녀 ㄷ. 이렇게 그들은 "셋이 사니 진짜 좋아"를 알게된다. 혼자보다는 둘이 좋고, 둘보다는 셋이 좋지만, 둘이 싫어 혼자가 된 'ㄱ'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앞뒤가 맞지 않아 하고 말하고 싶지만, 인과가 꼭 맞아야 세상사는 삶은 아닐것이다. ㄱ이 이야기를 하고 ㄴ이 이야기를 하고 멀찍이 떨여저 ㄷ이 다시 이야기를 한다. '어떤게 그렇게 좋아요?'라는 나의 의문에. '셋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더 좋았다고 나는 기억해요. 셋으로 삼각형을 이룬 게 아니었어요. 셋으로부터 확장되어 우리가 마침내 하나의 원을 이루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역동적이고 다정한 강강술래 같은 거요. 둘이선 절대로 원형을 만들 수 없잖아요. 셋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원형이지요.'(p.209) ㄴ의 이야기지만, ㄱ의 입을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 죽음 이후에 이야기임에도 나는 오롯이 ㄴ의 이야기임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분명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사랑이야기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한 남자와 두 여자 아니,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또 한 여자. 통속적인 이야기로는 이들은 연적이어야 하고, 질투로 몸을 불살라야 하건만, ㄱ은 이야기한다. 그녀에게 ㄴ도 ㄷ도 남자였다고.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담담하게 들려주지만, 이 또한 담담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가슴 속 응어리는 하나씩 있겠지만, 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응어리는 참 단단하게 뭉쳐있기도 하다. 오빠의 죽음, 형과 아버지의 죽음, 가방과 함께 휩쓸려간 아버지와 살기위해 조선족인 된 소녀. 평범하지 않은 이들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면서 첫 만나에서 부터 각작 죽음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던 것일까? 두렵지 않은 이별을 맞이하기 위해서. 평범하지 않기에 가능한 이야기들. 오롯이 행복을 영위하고 싶었던 이들의 이야기. "난 오로지... 혼자서... 결정했어!" "언니랑 아저씨랑, 우리, 지금 함께, 한 순간에 죽는게 가장 행복한 거, 맞잖아!" 일종의 비명이다.'(p.118) 행복의 순간을 인지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이들의 꿈틀거림.
베이킹을 하다 보면 밀가루를 체치고, 여러 종류의 향신료와 버터, 우유, 소금과 설탕을 넣은 후 반죽을 해야만 한다. 어떤 빵도 날 가루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반죽을 하면서 개개의 날가루들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휴지를 시킨 후, 오븐으로 들어가야 비로서 하나의 빵이 만들어 진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섹스는 그래서 '덩.어.리'일지도 모르겠다. "'덩어리라는 말에선 '상처의 주머니'가 아니라 '순수의 집합체'같은 광채가 느껴져서 좋아요." (p.200)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세사람은 개개인이 아닌 하나로 섞여 다시는 분리할 수 없는 상태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ㄷ의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p.202)라는 말은 혼자 분리되어 버린 혼합되기 전 날가루만이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쉽지 않은 이야기다. 데스마스크가 만들어진 과정은 벌써 밝혀졌지만, 작가가 플롯을 다루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 과정이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세탁기 버튼을 꾹 누르고, 그녀-그의 등 날개를 꾹 누르고, 그-활강을 시작한 그 찰나에, 나-그녀-그가 불멸의 부동심으로 가장 완전한 덩어리를 이루게 되리라는 것을.' (p.287)
플롯을 다루지 않는 흰 손의 선생님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ㄱ. 그녀의 「우물」이 우물을 파는 ㄴ으로 인해 오버랩 되면서 세상은 어쩜 내 작은 생각이 돌고 돌아 내게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별것 아니라고 대수롭게 이야기하지만 ㄱ은 자신의 첫소설과 ㄴ으로부터 받은 '벽조목'을 배롱나무 밑에 묻으면서 자신의 지난 생의 묘지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는게 다 이렇지.', ' 별것 아니야', '이런 사랑도, 저런 사랑도 가능하잖아.'라고 가볍게 이야기를 하지만, 어느 누구의 삶도 가벼운 삶은 없다. 다만 이야기하지 못할 뿐이다. 작가는 플롯에 메어있고, "나는 작가야. 그러므로 나는 평생 늘, 새로운 문장을 쓴다. 그동안 수십 편의 소설을 썼지만 똑같은 문장을 두 번 쓴 적은 한 번도 없다. 새로 쓰는 문장으로 이미 써버린 과거의 문장을 계속 엿 먹인다고 상상하면 가슴이 뻐근하다."(p.39) 라고 하면서 문장에 메어있다. 그러기에 귓속 곰팡이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메어있는 것을 풀어보라는 듯이 말이다. 나는 무엇에 메어있을까? 『소소한 풍경』속에서 『은교』와 『소금』을 찾고 있는 나는 작가가 말하는 사랑을 이해하고는 있는걸까? 모르겠다. 내가 나를 모르는것. 그게 인생이다. 그러기에 한낱 몸짓같은 ㄱ,ㄴ,ㄷ의 이런 사랑도 가능한것이 아닐까?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그들의 인생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