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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은 아이가 두살, 큰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으니, 큰 녀석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작은 아이와 종일 씨름을 했던 시기다. 미친듯이 화분을 사서 거실을 푸른 밀림처럼 만들었었고, 뭔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때가 나의 10년 전이다.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나는 행복할까? 내게 그 당시는 힘든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육체적으로도 너무나 힘든 시기였기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젊음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그 젊음이 책임져야만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으니 말이다. 다시 뭔가를 배우고 일을 시작한것이 작은 아이가 다섯 살 무렵이었으니, 10년에서 몇년은 더 흘러간 뒤에야 사람답게 생각이라는 걸 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내게 10년 전은 모든것이 힘들었던 시기로 남아있다. 물론, 몇해 전 이었다면 다르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마흔이 되기 전의 10년 전 이었다면 말이다.

앨리스의 시간은 스물아홉으로 멈춰졌다. 그 시간이 10년 전이란다. 육체가 10년 전으로 간 타임슬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체육관에서의 사고가 앨리스의 기억의 시계를 10년 전으로 돌려놨다. 10년은 분명 짧은 시간은 아니다. 나 역시 10년이란 시간동안 공부를 했고, 아이들이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고, 운동을 시작하고, 경력이 쌓여갔으니 1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채우기가 힘들것이다. 앨리스에게도 10년 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그렇게 다가온다. 부끄럼많았고, 언니를 자랑스러워하며 남편을 끔찍히 사랑하고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그 순수했던 시간이 앨리스에게 찾아왔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 오래 전 기억이란다. 첫 아이가 아니라 벌써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고, 언니는 자신을 피하고, 남편과는 이혼을 준비중이라는 새로운 앨리스.
앨리시는 경악했다. 10년 사이에 앨리스는 사람을 직업으로 판단하는 끔찍한 인간이 된 걸까? 앨리스는 언제나 엘리자베스 언니가 자랑스러웠다. 언니는 영리했고, 앨리스가 안전하게 한곳에 머무는 동안 늘 용감하게 모험에 나섰다. (p.35)
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혼미한 꿈속을 헤매다가 병원에서 눈을 뜬 앨리스는 분명 올해가 1998년이고 12주 된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현실은 2008년이고 선홍색 빛깔의 제왕절개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상황에서 앨리스는 누구나 그렇듯, 위기의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 자신이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 남편 닉과 친언니 엘리자베스를 떠올린다. '지금이라도 닉이 오면, 언니가 오면, 모든 걸 제대로 바로잡아줄 거야!' 그러나 연락을 받고 한참 만에 온 언니 엘리자베스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말들을 건네고, 포르투갈로 출장 중이라던 남편 닉은 어렵게 연결된 전화 통화에서 대체 또 무슨 수작이냐는 스물아홉에 앨리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충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하나 둘 지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고, 몸이 기억하는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가면서 앨리스는 잃어버린 10년을 꿰어맞춰간다. 자신의 어느 부분에 이렇게 매정하고 모진 부분들이 있었던 걸까? 꿈꾸던 삶을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스물아홉의 앨리스의 눈엔 서른아홉의 앨리스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아니, 어린 앨리스는 진짜 앨리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조금씩 스물아홉의 어린 앨리스는 2008년을 살고있는 진짜 앨리스가 되어가지만, 앨리스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어리고 순진하고 단순한 어린 앨리스와, 나이들어 현명하고 이성적인지만 냉소적인 진짜 앨리스의 시간으로 말이다. 2008년을 살고 있기에 서른아홉의 앨리스가 진짜인것 처럼 보이긴 하지만 어떤 것이 진짜라고 장담하면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앨리스에겐 스물아홉의 앨리스도 서른아홉의 앨리스도 앨리스이니 말이다.
'내가 10년간의 기억을 잊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어요. 놀라웠던 일, 즐거웠던 일, 화났던 일,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 같은 모든 기억을요.' (p.198)
'2008년에는 정말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시간은 한정된 자원이 되었다. 1998년에는 하루가 훨씬 한가했다.' (p.423)
기억의 조각들은 말썽쟁이 세 아이, 사랑했던 남편과 알 수 없는 이혼소송, 자랑스런 언니와 소원해진 관계, 친정엄마와 시아버지의 재혼, 앨리스의 인생을 바꿨다는 친구의 죽음, 새로운 애인이라는 도미니크의 출현까지 기억하지 못하는 10년동안의 변화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만들지만, 가장 놀라운 변화는 앨리스 본인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후 일주일 동안 앨리스는 과거와 현실 사이을 오가면서 10년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꿈에 그리던 값비싼 명품 가방과 옷을 입고, 골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쓰며, 하루에 200불이나 되는 돈을 지불하고 트래이너를 부르는 삶. 그런 생활로 인해 꿈에도 그리던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근사한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런데, 2008년의 앨리스는 행복하질 않다. 훨씬 한가했던 시간이 10년의 세월과 함께 충분치 않은 시간이 되어버렸고, 모든것이 풍족함에도 풍족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해가 제목이다. 리안 모리아티는 그녀의 기억의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기억의 부재로 인한 앨리스가 아닌, 행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부탁하는 것처럼 들린다.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를 통해서 변해버린 삶을 이야기 해주고 있지만, 변화는 앨리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당했던 언니는 불임으로 변해있었고, 남편을 잃고 숨죽였던 엄마는 시아버지를 만나 변해있었다. 어린시절부터 할머니라 불렀던 프래니는 블로그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다정다감했던 닉은 사업의 성공과 함께 옆에 없었다. 어쩌면 리안 모리아티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들 모두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의 기억이 아닌 다가오는 10년후를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10년후 어느날 또 다시 10년이라는 기억의 부재를 맞게 된다면, 그 시간엔 10년전 시간을 그리고 있을까? 아니면, 참 잘 살아왔다고 투닥여주고 있을까? 어제의 내가 오늘을 만들고, 오늘의 내가 내일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끔 과거의 나를 몽땅 잊고 살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나를 위한 또 다른 위로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