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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잊지 못하는 향기가 있다.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아빠 손을 잡고 걸어가던 날 바람에 머리위로 날리던 아카시아는 향기을 품어냈었다. 내 기억 속 아카시아 향기는 아빠의 냄새로 남아있다. 이젠 아빠라는 말보다 아버지가 더 자연스러워졌고, 그 시절의 아빠의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버렸음에도 여전히 아카시아 향기는 젊은 시절 당당하고 멋졌던 아빠를 떠올리게 만든다. 몇해전에 아버지께 아카시아에 대한 말씀을 드린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기억을 하지 못하시는걸 보면 내게만 강렬한 향기였는지도 모른다. 우리집 작은 녀석이 엄마 냄새라고 우기는 비누냄새는 어쩜 내가 아카시아향을 맡으면서 아빠의 젊은시절의 떠올리는 것처럼 후에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1214/pimg_7045411761118439.jpg)
아침에 일어나 내리는 커피향기는 하루를 풍요롭게 만든다. 집안 가득 퍼지는 커피향은 커피맛을 보기도 전에 가슴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기에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내려먹는 커피를 좋아한다. 하지만, 난 모든 일상에서 향기를 떠오르지는 않는다. 아주 가끔 장미향을 맡으면서 어디서 맡은 향인지 갸우뚱 할때도 있지만, 복숭아 향과 장미향의 오묘한 다름을 구별하지 못하는 내가 사물에서 향기를 맡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필립 클로델의 『향기』는 Acacia(아카시아)에서 Voyage(여행)까지 그가 경험하고 여운으로 남아있는 향기를 그려내고 있는 에세이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이기에 당연히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냄새와 기억에 대한 그리움과 삶을 다룬 산문집을 턱하니 마주하게 될지는 몰랐었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행복한 그리움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묘한 책이다.
작가의 공감각능력은 일반인의 그것을 확실히 뛰어넘는다. 어린시절의 향기는 그 시절을 보여주고 있기에 작가는 양배추에서 비루한 향을 끌어내지만, 난 양배추의 향을 좋아한다. 아니, 양배추를 좋아한다. 우리집 큰 아이도 양배추 향을 싫어하는데, 이 글을 읽게 되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를 만났음에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호텔의 향기는 어떨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무향이 호텔의 향기라고 이야기를 하는 글을 읽으면서 작가의 글에 동조하게 된다. 나를 지우고 내 전에 있던 이들의 향기를 지우는 곳이 호텔이니 말이다. a부터 v까지 알파벳 순서대로 글이 쓰여졌기에 어린시절 이야기와 성년의 이야기가 뒤섞여서 보여지고 있다. 처음엔 성장 수필처럼 보여지다가 갑자기 어린 딸의 이야기가 나와서 당황했던 이유는 글의 짜임 때문이었지만, 작가의 의중은 그에게 남겨진 향기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출판사에서 키워드로 뽑아낸 것처럼 여름에 내리는 흰 눈 같던 아카시아, 아침마다 아버지에게 젊음을 되돌려주던 메낭 스킨, 떨리던 첫 키스의 순간으로 안내하는 허브 향, 산책하던 숲에서 만난 동물의 사체에서 느끼는 폭력의 기억, 계절을 알리는 강물과 숲의 냄새, 사랑하는 삼촌이 남기고 간 낡은 스웨터, 노동의 숨결이 배어나는 담배 냄새, 선크림과 야외 수영장에 깃든 태양과 여름의 기억, 최고의 간식이었던 구운 베이컨과 마늘 향, 달콤한 과자의 풍미를 더하는 계피 향, ‘추위를 타는 이웃처럼’ 빽빽이 꽂혀 있는 책에서 풍기던 묘한 곰팡내, 방금 새로 간 침대 시트의 포근하고 청결한 향기, 이국의 도시에서 맞는 밤과 정열의 냄새, 가장 평안하고 숭고한, 잠든 아이의 살냄새. 향긋하고, 알싸하고, 달콤하고, 시큼하고, 고소하고, 매콤하고, 씁쓸하고, 퀴퀴하고, 때로는 후각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려낸 듯 재탄생된 추억과 향기의 목록들은 읽으면서 나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기억으로 만들어진 향기들이 추억이 될때가 종종있다. 한 순간의 풍경이 향기로 다가오고 그 풍경이 향기와 함꼐 추억이 되기도 한다. 내 어린시절 아카시아 향처럼 말이다. 아마, 글의 처음이 '아카시아'였기에 책을 읽는 내내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아빠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버스에서 책의 마지막을 읽었었다. 덜컹거리는 버스는 속을 메스껍게 만들고 버스의 휘발류 냄새가 얼마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필립 클로델의『향기』는 휘발유 냄새와 함께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맡았던 향기보다 내가 살아갈 날 동안 맡게 될 향기가 훨씬 다양할 것이다. 내 어린시절에 경험하고 느꼈던 것보다 근 10년간의 경험이 훨씬 다양하니 말이다. 아이들 역시 새로운 경험이 향기와 함께 버부려져 새로운것을 기억하게 될것이다. 그 향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을 만들 수 있는지를 필립 클로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