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명회는 남이 장군을 제거했을까? - 남이장군 vs 한명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6
임채영 지음, 최상훈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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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왕조가 만들어질때는 지도자는 탁월한 능력, 리더십이 필요하고, 지도자 주변에 뛰어난 장수들과 책사가 있어야만한다.  그뿐인가?  백성들의 신뢰와 지지를 받아야 지도자로서의 모든것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새로운 왕조가 탄생할때마다 하늘은 영웅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 영웅은 백성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었다.  이중 백성들의 지지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고, 그러기에 백성들에게 신뢰받는 자는 기존 정치 세력에게는 늘 위험한 인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한 왕 밑에 있는 고관대작들에게는 더욱더 무서운 '공공의 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 신왕에서 장군으로 모시는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남이 장군이다.  얼마나 대단하면 무속인들이 장군으로 모실까?  이 남이 장군은 어려서부터 백성들의 믿음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태종의 넷째 딸 정선 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남이 장군은 한명회와 함께 훈구파의 양대 산맥이었던 권람의 사위였다.  어려서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뛰어난 무예와 지략으로 변방의 여진족을 무찔러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았고, 1467년 조선 개업 이후 가장 큰 반란이었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면서 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지만, 세조 사후 예종떄 '남이의 옥'으로 인해 거열형으로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남이 장군에 이름만 알고 있었기에 남이 장군이 이렇게 젊은 인물인줄 역사공화국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번 한국사법정에서는 남이장군이 자신을 모함한 훈구 세력의 중심인물 한명회를 법정에 세워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 하고 있다.

 

 

   조선 역사속에서 한명회만큼 많이 등장하는 인물도 흔치 않을것이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두고 '자신의 자방'이라고 할 정도로 꾀와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하기에 수양대군을 세조로 만들었고, 한평생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이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왕을 모시며 예종, 성종의 장인으로 영의정의 자리에 앉았었을 뿐 아니라, 세조의 유언으로 예종 즉위 3개월 동안 왕의 권한을 가진 원상으로 있기도 했다. 이만하면 개국공신 못지않다.  태조의 왕조 설립에 도움을 준 인물들을 개국공신이라고 하는데, 개국공신들의 자손은 나라에서 보상차원으로 관직을 주었다  한명회는 그 덕으로 처음 관직에 오르게 되지만, 그의 야망은 '계유정난'을 통해, 정난공신이 되고, '남이의 옥'을 거쳐 익대공신이 된다.  일흔이 넘는 나이까지 장수를 하였고, 압구정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지만, 사후 연산군 시대에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또 한번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나오게 된다. 

 

  훈구공신은 세조의 집권을 도운 인물들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과는 차이가 있다.  신봉하는 학문과 사상도 훈구파들은 대부분 성리학을 신봉하였고, 이를 나라 운영의 기본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정변이 있을때마나 깊숙이 개입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대표적 인물로 한명회, 권람, 홍윤성, 정인지, 신숙주, 정창손, 김국광 등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 집현전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의 국가 체계를 정비하고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사화를 일으키고 관직과 특권을 독차지하여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였으며 부정부태를 일삼기도 했다고 하니, 권력은 물과 같아서 그대로 두면 썩는다.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6권은 '남이 장군 vs 한명회'로 왜 한명회는 남이 장군을 제거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본 법정에서 피고인 한명회는 자신은 남이장군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고, 남이 장군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역모죄와 유자광의 고발로 시작을 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유자광이 남이 장군의 시를 엿듣고 男兒二十未平國(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이라는 문장을 男兒二十未得國(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꿔서 권력에 쟁점에 있던 남이 장군을 역모죄를 씌었다는 것이다.  유자광의 고발로 남이 장군이 옥에 갇히고,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몰라서 법정에 세운것은 아니다.  이번 법정을 통해 한명회가 당시 왕을 능가하는 핵심 권력 기관의 수장으로 나라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결재하던 위치에 있었다는 것.  훈구파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의 대표로 훈구파에 맞서는 남이 장군을 탄압하였으며, 세조 사후에 숙청이 이뤄진 거으로 미루어 당시 혹은 이후로 예상되는 적대 정치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왕도 부럽지 않을 권세를 누렸던 한명회.  조선 전기에 뛰어난 활약을 하며 임금과 백성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남이 장군.  하지만 그는 불과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역모를 꾀했다는 모함을 받아 처형되고 말았다.  역사의 가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항상 꿈을 꾼다.  그랬다면 어떘을까하고 말이다.  만약 남이 장군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무속인들의 신이 아닌 살아있는 장군으로 나라를 위해 살았다면 우리 역사가 조금 더 윤택해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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