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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남자가 죽었다. 입은 실로 꿰메여져 있고, 구타를 당한 뒤 목이 매달린 끔찍한 모습으로 이 남자는 발견된다. 호쿠오카 형무소. 간수병이 었던 스기야마 도잔은 주머니의 시가 적인 종이 한장만을 간직한 채 이렇게 발견되었다. 그리고 스물이 되지 않은 학도병출신 와타나베 유이치가 이곳으로 전입된지 겨우 4일만에 이 살인사건을 맞는다. 죽어서 유령이 된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부터 유령 같은 인물이었던 스기야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출간 전, 영어권의 대표 명문출판그룹 중 하나인 영국의 팬 맥밀란(Pan Macmillan)에 ‘전 세계 영어판권’이 팔려 출판가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정명 작가의 신작 <별을 스치는 바람>은 이렇게 시작된다. 올초를 들썩 거리게 만들던 드라마<뿌리깊은 나무>의 원작가가 이정명 작가다. 드라마로 그에 작품이 만들어질 때마다 흥행을 하고 있으니, 책을 만나기도 전부터 드라마로는 어떻게 탄생할지가 더 궁금해지는 그런 책이었다. 윤동주의 이야기라 알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스기야마 도잔이라는 인물의 미스터리 살인 사건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책을 좋아하던 헌책방 아이, 와타나베 유이치가 있었다. 스물도 안된 어린 소년에게 내려진 명령. '스기야마의 살인범을 찾아라?' 과연 유이치는 살인범을 찾을 수 있을까? 스기야마의 삶을 파헤치면서 알게 되는 이야기들. "스기야마 도잔은 책벌레였지. 그는 문장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개 같았어."(p.53), "스기야마 도잔은 섬세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음악을 알고, 시를 이해하고 삶을 사랑했어요."(p.139). 이게 말이 되는가? 일자무식이라는 사람이 책벌레에 음악을 알고 시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니. 툭하면 조선인들의 머리를 터트리고 폭행을 했던 사람에게 이런 말이 가당키나 하는가?
서서히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 처럼 보였다. 331번 최치수. 그가 의심스럽다. 죽어라 스기야마에게 폭행을 당했던 인물. "누가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누가 살아남느냐가 중요하지." (p.7)라고 이야기하는 인물. 스기야마에게 머리가 깨지고 독방행을 자처했던 인물. 그는 왜 독방으로 향했을까? 그과 동료들의 모습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짧아진 바지. 낡고 툭 튀어나온 무릎. 그에게 절대 복종의 의미로 무릎이라도 꿇는었던 것일까? 그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들락거리는 독방. 그리고 그곳을 드나드는 또 한 사람. 그들과는 다른 남자. 스기야마의 주머니 속에서 나온 시와 같은 느낌의 시를 쓴 사람.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된 조선독립운동분자'로 연루되어 잡혀온 히라누마 도주.
그들은 활자 속으로 도망친 영혼들이었다. 그들의 숨결은 책갈피 사이에 살아 있었고 그들의 영혼은 책 속에 깃들어 있었다. 종이는 그 들의 부드러운 피부였으며, 잉크는 그들의 피였고, 사철 실은 그들의 인대였다. 나는 먼지투성이 서가에서 그들을 만났고 그들의 위로를 들으며 자랐다.(p.79)
검열실에서 발견 된 부활, 죄와벌, 레미제라블, 돈키호테, 악의 꽃, 적과 흑. 그리고 히라누마의 시. 오래된 책방에서 책속에 있었던 아이, 유이치. 히라누마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었나요?' '당신도 이들을 알고 있군요?' 글을 아는 사람들. 글을 모르면서 검열관이었던 스기야마. 조선인들의 엽서를 대필해주던 히라누마. 무엇이 그들을 운명의 수레바퀴에 집어 넣었을까? 엽서를 통해서 스기야마에게 말을 건네는 남자. 그남자의 글을 보고 책을 찾기 시작하는 스기야마. '그는 결코 알지 못했다. 읽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감각이라는 사실을, 한 줄의 문장을,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혹은 그의 세계를 읽는 행위라는 것을'(p.169) 이렇게 스기야마 도잔은 변해가고 있었다. 시를 몰랐던 그에게 시를 알게해주고, 잠들어 있던 작품들을 꺼내준 남자, 히라누마. 그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어떤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문장은 한 인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불치의 병이다. 단어와 구두점들은 몸 여기저기에 세균과 바이러스처럼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문장들은 뼈에 새겨지고 세포 속에 스며들고 자음과 모음은 혈관을 타고 흐른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는 뇌세포를 물들이고 영혼을 재구성한다. 그는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가서도 안된다.'(p.220)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어디서든 모이는 조선인들. 같은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이도저도 아니면 같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끊임없이 이야기를 웅얼댔고, 시끌시끌한 장바닥처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엽서를 대필하는 히라누마. 그가 이야기 한다. "말씀 언(言) 변에 절사(寺), 시(詩)는 말의 사원이지요"(p.236) 일본에 오기 위해서 창시개명을 했던 남자.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아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운다.
서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던 스물 네살에 청년.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재처럼 사그라져 버리고 있는 청년. 냉혹한 검열인이었던 스기야마는 더러운 전쟁이 세상을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해도 그의 시만은 살아남게 하고 싶었는데, 단 한사람이라도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그의 시를 읽고 위안받을 수 있게 하고 싶었는데,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날리던 연도 날리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변해버렸다. 낱말과 구두점 하나하나가 물방울처럼 가슴에 맺히게 만들던 청년.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청년의 그림자가 점점 더 사그라 들기 시작했다. 그가 이야기 한다. 졸업을 앞두고 열아홉 편의 시를 베껴 쓴 필사 시집 세 권 중 한 권을 간직하고, 한 권은 함께 하숙하던 정병욱에게 맡긴 후 마지막 한 부를 들고 대학 은사 이양하 선생에게 있다고. 그의 시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히라누마라 불렸던 시인, 윤동주, 그리고 스가야마.
스가야마의 사건을 파헤칠수록 드러나기 시작하는 새로운 사실들. 윤동주를 돕고 있었던 스가야마. 최치수와 윤동주가 있었던 독방과 이어지는 땅굴. 유이치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변하게 하고 있는가? 그저 영원히 몰랐다면 좀 덜 슬프고, 덜 아팠을 이야기였을까? 너무 늦게 알아버린 진실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히라누마라 불리던 시인의 시들이 가슴을 찌르기 시작한다. 장마가 시작되는 밤에 읽는 시인의 시들이, 그가 들려주는 시의 향연이 축제의 향연이 아닌, 슬픔이 뚝뚝 떨어지는 그런 글이 되어 다가온다. 창시개명을 괴로워 하던 시인. 지식인의 울분을 시로 표현했던 아름다운 청년. 윤동주. 볕이 쨍쨍한 날 읽었다면 덜 슬펐을까? 시인의 시를 알던 일본인들. 시는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아니, 글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그의 이야기를 읽을수록 슬퍼지건만, 이야기를 멈출수가 없는것은 그를 이렇게 떠나보내기 싫어서 일 것이다. 그래서 또 다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