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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활자는 영혼을 가지고 있고 그 영혼은 바이러스처럼 읽는 사람을 감염시킨다. 독서는 치명적인 중독이고 문장의 세례를 받은 자는 평생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책과 글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중독자이고 의존자다. - p.64 / 스기야마의 메모 중

어떤 일이 벌이지고 있었던 것일까? 1944년 호쿠오카 형무소에서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막을 내리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간수였던 이치로는 여전히 감옥 안에 있었다. 이번엔 철창 밖이 아닌 죄수복을 입은 죄수의 신분으로. 그리고 그가 이야기를 한다. 종쟁을 이야기 하기 6개월 전까지의 이야기. 세상과 분리된 적막한 형무소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어떤 폭력으로도 꺾을 수 없었던 이상과 두꺼운 벽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자유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스기야마라는 간수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이야기 한다. 이치로가 독방에서 발견을 한것은 탈옥을 위한 터널만이 아니었다. 검열실 밑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통로. 스기야마의 흙 묻은 바지와 검열실 밑에 있던 또 다른 세상. 책들의 무덤이 되어 버려야 했던 곳에 좁고 어둡고 고독한 지하 공간은 경이로운 도서관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치로는 이 사실을 보고할수가 없었다. 비밀 도서관의 존재가 드러나면 도서관은 메워질 것이고 책들은 불 살라질 것이니까. 그는 책의 언어에 목말라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것들은 나와 같은 종족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종이와 잉크를 파먹으며 살아가는 책벌레. 책은 놈들의 먹이였고 은신처였고 무덤이었다. ... 나는 놈들이 부러웠다. 놈들처럼 책 속에서 태어나 책을 먹고 살다 책 속에서 죽고 싶었다.'(p.40)라고 외치는 사람이 책을 불사를수는 없었을 테니까. 놀랄만한 박식함과 뛰어난 통찰력으로 비밀의 도서관을 만든 사람이 궁금했다. 아니, 그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들 뿐이었으니까. 스기야마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이치로는 충격과 의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왜 그렇게 상반된 삶을 살았을까?', '그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그를 죽인 진짜 살인자는 누구일까?' 이치로가 사건속으로 들어갈 수록 형무소장인 하세가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한다. '깊이 들어가지 마라. 이것으로 스가야마 살인 사건은 종결되었다.' 종결이 아닌 사건, 사건의 범인은 최치수가 아닌데, 최치수로 몰아버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To be or Not to be' 동주에겐 That is the question의 문제가 아니었다. 동주에게 죽느냐 사느냐는 생과 사를 뜻하는 용어가 아닌 '가만히 있느냐?' '가만히 있지 않느냐', 행동하느냐 행동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치로의 문제이기도 했다. 살인사건에서 제외된 인물 윤동주. 그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시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무너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의무조치 대상자가 되어 의무병동에 들어가건만 그의 머리속 언어들이 파괴되는 것이 느껴진다. "찾아도 없으면 우리가 만들어야 하겠지. 희망, 행복, 꿈 같은 것들과 멋진 시를 말이야. 우리가 바라는 시는 종이 위가 아니라 모든 곳에 있어. 좁은 감방 안에, 굵은 철창 속에 말이야. 나를 가둔 철창 덕분에 난 더 절실한 시를 쓸 수 있게 된거야."(p.134)라고 이야기 하던 이 더러운 형무소에 갇히기엔 너무도 고결한 그가, 단지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라는 그의 세계가 변화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쁜 소식도 아름답게 쓰는 재주가 있던 사람, 희망의 말을 듣고 싶었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었던 사람. 그가 옆서를 쓰지 않자 조선인 수용동에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글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역사는 알려준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연합군 최고사령부 법무국 검찰과는 1945년 5월 5일 후쿠오카 지역에 불시착한 미 공군 B29 전폭기에 탑승했던 열한 명의 조종사와 승무원등 미군 포로들의 이야기를 밝혀냈다. 그리고 그들이 생체실험을 당했던 곳이 후쿠오카 수용소에 의무국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끔찍한 죄상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 현장속에 동주가 있었다. 혈청을 만든다면서 의무조치 대상자들에게 바닷물을 주사한 의료진들. 영문없이 쓰러져가던 조선인들. 그 속에 동주가 있었다. 그렇게 동주는 1945년 29세의 나이에,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에 죽음을 맞는다.
진실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입니다. 기록이 불태워지고 감추어졌다 해도 진실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나의 기록이 소실되고 나의 진술이 사라져도 제가 본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p.288)라는 이치로의 말처럼 진실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동주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이치로는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 의무국의 간호사 미도리의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스기야마의 죽음뒤의 진실 역시 긴장감 속에서 밝혀낸다. 전쟁중이기에 가능했다 하더라도 슬픈 이야기들.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윤동주 시인의 시들이 슬쩍 슬쩍 숨겨져 있는것 같지만,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그가 읽었던 불후의 명작들이 펼쳐지고 있는 <별을 스치는 바람>은 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라잃은 백성들, 힘 없는 민초들, 무엇이 그들을 바로 설수 있게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었다. 다시는 마태복음 5장 3절의 팔복이 슬프지 않게 하기위해서라도 말이다.
팔복(八福)
- 윤동주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