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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평점 :
비천한 하급 여신, 키르케
그 안에 숨죽인 마녀가 깨어난다!
책을 읽기 전 책 뒤표지에 적힌 ‘비천한 하급 여신, 키르케. 그 안에 숨죽인 마녀가 깨어난다!’라는 문구에서 그저 악랄한 마녀를 상상했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마녀’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만난 키르케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었고 어느 대가 하나 없이 인간을 도와주는 여신이었으며 자신의 아이를 목숨 걸고 지키는 한 아이의 엄마였다. 전작 <아킬레우스의 노래>가 재미있었다면 <키르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지인의 이야기가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며 마음을 울렸다.
눈이 노란 게 오줌색이야. 목소리는 올빼미처럼 끽끽거리고. 저렇게 못생겼는데 매가 아니라 염소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키르케는 티탄 신족인 태양신 헬리오스를 아버지로 두었으나 아버지의 기본적인 능력조차 가지지 못했고 여신 중에서 가장 말단 님프 페르세를 어머니로 두었으나 님프의 유일한 힘인 타고난 미모 또한 없었다. 자신을 희롱하는 동생들을 피해 아버지의 발치에서 황금빛으로 물드는 세상을 보며 아버지의 능력을 감탄하며 숨죽여 지내던 키르케, 인간 남자 글라우코스를 사랑하게 되고 그를 신으로 만드는데 성공하나 신이 된 글라우코스가 사랑한 님프는 스킬라였다. 그녀의 추악한 면모가 드러나길 원했던 키르케는 줄기를 꺾어 하얀 즙을 스킬라가 목욕할 물에 한 방울, 한 방울 떨어트린다. 그렇게 괴물이 되어버린 스킬라. 이 둘을 통해 그리고 남동생 아이에테스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 능력으로 '마녀'라고 불리며 무인도 아이아이에 섬으로 유배를 당한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야, 키르케. 나는 아버지에게 마법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얘기하고, 아버지는 내 말을 믿는 척하고, 제우스는 아버지의 말을 믿는 척하고, 그렇게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지. 실토한 누나가 잘못했어.
같은 능력을 가진 남동생 아이에테스는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며 아버지의 신임도 얻으면서 거짓말로 그들을 속이는데도 멀쩡하고, 사실대로 말한 키르케는 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벌을 받은 이유가 뭘까? 왜?
그저 여신은 미모에 집착하고 후계자 양성에 힘을 쓰며 자신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상대방에게 질투하며 복수하기 바빴다.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는 매들린 밀러 작가의 손에서 키르케가 기존 여신과는 어떻게 다르게 성장해 나갈지 궁금해진다.
아무도 용기가 없나? 어느 누구도 감히 나를 상대하지 못하겠단 것인가?
혼자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공포로 다가왔던 섬 생활은 키르케에게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성장시킬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여러 약초와 꽃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하나 둘 꽃피우기 시작하고 자신이 착시를 일으키는 데에 소질이 있고 특히 변신이 가장 재능 있는 분야라는 걸 알게 된다.
어느 날 제우스의 아들이자 그가 선택한 전령 헤르메스가 찾아오고 그를 통해 세상 이야기를 들으며 본인이 지내는 이곳이 아이아이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와는 연인이 되었지만 오직 헤르메스는 자신의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관계를 이어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로부터 배가 이 섬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이아이에섬을 찾아오기 시작한 손님들, 어쩌면 이때부터 본격적인 마녀의 이야기가 탄생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겠습니까?" 그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세상은 추악한 곳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고요."
첫 손님은 자신의 여동생 파시파에가 보낸 다이달로스였다. 파시파에가 황소와 관계를 갖고 임신을 한 상태로 괴물을 낳게 되었고 그 괴물을 키르케가 주문으로 허기를 잠재운다. 그리고 두 번째 손님은 죄를 짓고 자신의 죄를 씻으러 찾아온 아이손과 아이에테스의 여식 메데이아였고 세 번째 손님은 말을 안 듣는 딸을 키르케를 모시라는 벌을 내려보낸 님프들이었으며 네 번째 손님은 진정한 첫 손님 인간이었다.
연약한 인간을 보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그들은 호의와 넉넉한 씀씀이를 고마워할 줄 아는 존재라며 그들이 자주 왔으면 좋겠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즐겁게 음식을 대접한다. 정말 인간을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키르케에게 돌아온 건 그녀가 이 섬에 혼자라는 걸 안 그들의 폭력과 겁탈이었다. 그런 그들을 키르케는 주문을 외워 돼지로 만든다. 돼지면 양호한 거 아닌가?! 난 그들이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찢어 죽였어야 마땅한 그들이었다. 어떻게 손님이 찾아왔다며 자주 왔으면 좋겠다고 즐거워한 그녀를 그렇게 짓밟을 수가 있는가? 정말 마녀가 키르케일까? 그들이 아니라?? 그 뒤에 오디세우스와 함께 등장했던 부하들조차도 그러니... 상처 입은 키르케의 마음은 누가 진정으로 돌봐주는거야??ㅠㅠ
키르케를 읽다 보면 기존에 알고 있던 에피소드와 함께 많은 신들을 만나볼 수 있어 읽는 재미가 더했다. 인간에게 불을 주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 전령의 신 헤르메스, 미로를 만든 다아달로스, 아이손과 메데이아 그리고 키르케의 연인으로 나온 오디세우스까지. 그런데 기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던 이들의 이야기에서는 난 키르케의 등장을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 위에서 언급한 신들의 에피소드는 기억이 나는데 키르케는 기억이 안나니, 그만큼 누구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냐에 따라 이렇게 이야기가 달라지나 보다.
매들린 밀러의 손에서 탄생한 <키르케>는 기존 신화 속 내가 만나왔던 신들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줬던 여신이었다. 어쩌면 나 또한 '마녀'라는 단어에 얽매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쯤이면 키르케가 진정한 마녀가 되어서 자신을 희롱했던 가족들과 인간들에게 복수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 장면이 나오길 기다렸으니 말이다.
예언이라는 굴레에 무릎 끊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워 아테네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지킨 키르케. 자신이 만든 괴물 스킬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자 죄책감을 가진 키르케. 끝내는 맞서 싸워 스킬라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많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 가던 키르케가 아버지 헬리오스를 불러 당당하게 유배를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에서는 짜릿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힘으로 멋지게 성장한 키르케의 모습을 보며 모든 이들이 키르케처럼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자신이 그리던 삶을 살아가며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할게요.
그래서 당신이 행복해진다면
내가 같이 갈게요.
내 안에서 어떤 존재가 기다리고 있을까?
p.497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서양 문학 최초로 등장했던 마녀 <키르케>
그녀는 인간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