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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세계문학·프랑스 소설 / p.220
컵에 담긴 같은 양의 물을 보고 어떤 사람은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 반도 안 남았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같은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판단이나 선택이 달라질 수 있고, 그 달라진 결과에 따라 또 다른 상황이 연계되어 돌아간다.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듯,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반도 안 남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살아가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고 배우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마치 이 세상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스승 팡글로스로부터 배운 낙관주의를 유지한 채 세상에 나가 성장해나가던 캉디드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되묻는다. 이 세상을 최선으로 이루어진 낙관주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최악으로 이루어진 비관주의로 볼 것인가.
‘순박한’, ‘순진한’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 캉디드는 원인 없는 결과란 없고, 인간이 겪는 고난도, 자유도, 세상의 최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믿는 단순한 낙관주의자다. 그런 그가 사랑하는 남작의 딸 퀴네공드 양과 키스를 하다 남작에게 발각되어 쫓겨나게 되면서 온갖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런데 그 고난의 과정들이 저자 특유의 익살과 해학으로 버무려지면서 불행의 연속임에도 아이러니하게 웃음이 나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눈 떠보니 성에서 쫓겨나 군대에 들어가 있고, 눈 떠보니 폭풍우에 난파당하고 있는 배에 있고, 눈 떠보니 지진을 막기 위한 제물로 놓인 상황이랄까?! 정말 세상이 그를 기다렸다는 듯 전쟁과 살인, 지진과 같은 참사에 놓아두고서 그의 반응을 보는 느낌이다.
거기에 그가 정처 없이 떠돌며 만났던 돈이나 아름다운 여자에 욕심을 내던 사람들, 신에 대한 믿음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던 사제들,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 전쟁을 하던 권력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사악함과 추악함을 끝도 없이 보여준다.
꼭 누가누가 더 불행한가 내기를 하는 한 편의 콩트처럼.
인간의 타락과 저주는 최선의 세계에 필연적으로 들어 있는 것일까? 인간의 자유 의지는 절대적 필연과 일치하는 게 맞는 것일까? 저 결과가 생기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시련을 겪으며 만난 염세주의 철학자 마르틴과의 논쟁을 하며 결국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 팡글로스의 가르침에 의문을 갖던 캉디드. 우연적이고 필연적 사건들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으며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필연성에 대해 끊임없이 논하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두 사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 이야기였다.
나는 긍정적인 생각들이 긍정적인 행동을 낳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나친 낙관주의는 판단력을 마비시킬 수 있으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며 공존하며 나아가려 노력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이처럼 어느 사상이 옳고 그른지 따지고자 했던 것이 아니지 않을까?!
그리고 그 해답은 캉디드의 마지막 대사에서 엿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 최선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연계되어 있네. 만일 자네가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 죄로 엉덩이를 발길로 차이면서 성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또 종교 재판을 받지 않았더라면, 또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지 않았더라면, 또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또 엘도라도에서 가지고 온 양들을 모두 잃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여기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를 먹지 못했을 것 아닌가.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p.200
낙관주의 캉디드를 통해 볼테르의 철학적 사유를 즐겁고 재미있게 알 수 있었던 시간으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로 조금은 세상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분께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