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8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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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 손영미 옮김 | 문학동네

세계문학 / p.440

특이하다고!

우리는 같은 종이에서 잘라낸 인형들처럼 다 똑같은데, 뭘.

벽에 찍은 스텐실 패턴처럼 똑같다고.

우리는 좀 다르게 살 수 없을까, 메이?

p.96

어쩌면 우리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훈련된 산물인지도 모른다. 솔직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자연 상태의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자신이 믿어온 온갖 규범으로 교모하게 만들어지는 인위적인 존재. 그래서 정해진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나아가려고 하면 그 길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가야 한다며 종용하기도, 받기도 한다.

그렇게 눈이 안대로 가려진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계기로 안대의 존재를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느 쪽에 속한 사람(부모)일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묻게 했던 이야기.

그리고 세밀하게 그려지는 뉴욕 사교계와 섬세하게 묘사되던 아처의 심리가 왜 여성 최초 퓰리처상을 수상했는지 제대로 보여주던 소설이었고, 다시 한번 「순수의 시대」를 통해 이디스 워튼 저자에 반한 시간이었다.




습관과 전통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 정말 한 치의 오차 없이 틀에 맞추어 살아가던 사람들 앞에 어느 날, 남편을 떠나 고향으로 온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등장하며 큰 파장을 불러온다.

특히 자신이 살아온 세계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살아가던 아처에겐 그녀는 그의 가치 체계를 뒤집는 존재였고, 그녀로 인해 여성 또한 남자들처럼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뉴욕 사교계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히던 약혼녀 메이 웰런드의 모든 솔직함과 순수함이 본능과 전통이 시키는 훈련의 산물이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된다. 그리고 독자적인 삶을 살아온 올렌스카 백작부인에게 서서히 빠져든다.

불성실한 남편과 이혼하고 고향에서 지내며 과거의 삶을 다 벗어버리려고 했던 올렌스카 백작 부인별거 생활을 하느니 불행한 아내로 사는 쪽이 더 행복할 거라 생각하며 그녀가 남편에게 돌아가길 원했던 사람들. 올렌스카 부인을 사랑하며 자신의 세계에 의문을 가졌고 인습과 위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으나 메이와 결혼하며 결국은 그 인습대로 살아간 아처.

"법은 이혼을 인정하지만, 사회 관습은 그렇지 않아요. …… 솔직히 그렇게 심한 추문에 휩싸일 수 있는데, 아니 휩싸일 게 뻔한데, 그 대가로 부인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제 자유…… 제 자유는 아무것도 아닌가요?" p.129




미묘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지던 뉴욕 사교계의 민낯부터 시작해 오랜 전통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구세계와 신세계의 서로 다른 가치관과 풍습 등의 주제에 저자의 뛰어난 필력이 더해지면서 나를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가두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이야기.

무엇보다 메이가 아처가 생각한 모습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던 장면에선 소름이 돋았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은 무미건조했고 자신이 놓친 것이 '인생의 꽃'이었다고 말하며 되돌아가던 아처의 뒷모습에 먹먹함이 몰려오게 했던 이야기였다.

이디스 워튼 저자의 세 번째 작품으로 읽게 된 「순수의 시대」는 사랑 이야기이면서 사랑 이야기가 아닌 더 깊이가 있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세 작품이 다 다른 사람이 쓴 거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 다른 작품에선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되고 기다려지게 만든다.

정말 「순수의 시대」를 읽는 동안 그 자체의 시간이 너무 좋았던 시간이었다.

ps. 인물들의 이름에 숨겨진 의미는 정말 엄지 척이다! 👍

순수의 시대, 인상 깊은 글귀

무지와 위선이 만든 삶 속 로맨스 소설책 추천

▶ 사람들은 대개 결혼하는 남자들은 그렇게 순수한 여자를 원하고, 그런 여자와 결혼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여겼다. 신부의 그런 순수함을 눈사람처럼 깨부수는 것이 주인된 남편의 기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55

▶ 상류층에서 인기 있는 동네라! 여기 사람들한테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각자 취향이 있는 건데. 제가 너무 독립적으로 살았나 봐요. 어쨌든 저도 여기 사람들과 똑같이 친구들의 사랑을 받으며 안전하게 살고 싶어요. p.86

▶ 밍곳 집안에는 남과 다르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남과 다르게 사는 걸 천연두보다 무서워한다니까. p.173

▶ 다음 순간, 너무 많은 것이 허비되고 망가졌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둘이 이렇게 가까이, 안전하게, 한방에 같이 있는데도 마치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각자의 운명에 묶여 꼼짝할 수 없었다. p.273

▶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자기가 운명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와 동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쾌활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요즘 애들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럴 능력도 있고.' 아처는 전형적인 신세대 청년인 아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들은 옛 이정표를 전부 없앴고, 그러면서 안내판이나 위험 신호까지 제거해버렸다.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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