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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평점 :
영의 자리
고민실 | 한겨레출판
한국장편소설 / p.248
어릴 때, 확고한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친구들을 볼 때면 나도 빨리 꿈을 가져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기곤 했다. 아마도 거침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앞서 나가는 그 친구들은 자신의 자리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에 뭐라도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아등바등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영의 자리」를 읽고 보니 그 시절부터 1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0이었지 않았나 싶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닌 0에 가까웠던 시절. 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으로 설레면서도 우울한 과정 말이다.
‘나’ 또한 무엇이 되려고 한 적이 없었던, 수험생이어야 하니까 수험생으로 살았고 취준생이어야 하니까 취준생으로 살았던 아직 ‘1’이 되지 못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런 그녀가 한때의 나를, 그리고 지금 어쩌면 그 과정 속에 있을지도 모를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던 시간이었다.
👨⚕️유령이 또 왔네.
🙎♀️네?
👨⚕️유령이라고.
🙎♀️유, 뭐요?
👨⚕️몇 번을 말해. 약사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유령이라니까. 19
20대에 정리해고된 ‘나’는 급하게 이직을 해보지만 그 회사마저 경영 악화로 1년을 겨우 넘기고 폐업을 한다. 결국은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구직활동을 시작하면서 취준생 대신 백수라 불리는 사람이 되었고 무엇이든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에 알바를 알아본다.
그렇게 나이 무관, 성별 무관, 학력 무관, 경력 무관이라는 누구나 일할 수 있는 일이면서도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일을 플라워 약국에서 일하게 된 ‘나’.
그녀가 면접을 보러 온 자신을 보자마자 ‘유령’이라 부르던 약국의 김 약사와 또 한 명의 유령 조부장과 함께 일하며 기꺼이 유령이 되고자 한 이야기이자 오고 가는 손님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전환점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 「영의 자리」.
'나'가 조금씩 자신만의 존재를 찾아가던 그 과정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했고 저자의 응원을 받기도 했던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녀와 조부장에게 유령이라고 말했던 김 약사조차도 유령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한때 혹은 지금 유령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저자의 말처럼 1이 되지 못한 0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희미해져가는 유령의 존재이기만 한건 아니지 않을까?
영에 어떤 숫자를 더하든 영은 사라지고 그 숫자만 남지만 영에 어떤 숫자를 곱하면 그 숫자를 영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영은 영 외에 될 수 없고, 다른 숫자에 기댈 때 영은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0도 하나의 수이자 하나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왠지 모르게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은 끊임없는 경쟁과 불평등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길 영의 자리를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어떤 관계를 맺을지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나'의 생각처럼 때론 그 관계에 너무 얽매이질 않길 바라본다.
나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었다. 0은 다른 숫자 뒤에 채워 넣기만 하면 얼마든지 큰 수를 표기할 수 있다. 어쩌면 인도에서는 신의 무한한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0을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선창을 시작했다. 나도 피켓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함성에 묻히는 것 같아도 분명히 제대로 하나의 소리를 더하고 있었다.
고민실의 한국장편소설, 「영의 자리」인상 깊은 글귀
유령이 되기로 했다. 유령이라고 하니까. 믿음 앞에서 논리는 무용했다. 사람들은 사실을 근거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이야기를 선택할 뿐이다. p.32
바다에 가자. 죽지 않기 위해서는 나쁜 기억이 중요할지 몰라도 살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이 필요해. p.56
조제약은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지만 일반약은 누구나 쉽게 쇼핑한다. 열이 나면 해열제, 속이 거북하면 소화제, 설사가 나면 지사제, 염증에는 진통소염제. 스스로 판단하여 복용 여부를 결정한다. 부작용은 오롯이 내가 감당할 몫이다. p.167
이제 의학은 마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약까지 만들어냈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미신을 믿는다. 건강에 해로운 줄 알면서 단 거를 먹고 담배를 피운다.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그저 견디기 위해서는 진통제라도 필요했다. 어쩌면 신이 사라진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물을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p.179~180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관계를 맺는다. 관계와 관계 속에 사람이 있다. 246
+ 하니포터 3기 참여자로 한겨레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으나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된 서평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