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주
실비 제르맹 지음, 류재화 옮김 / 1984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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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주

실비 제르맹 | 류재화 옮김 | 1984BOOKS

에세이 / p.144

어느 날, 그들이 거기 와 있다. 어느 날, 몇 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왜 오는지, 어떻게 오는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늘 그렇게 느닷없이, 난입하듯 온다. 그렇다고 소란스러운 것도 아니다. 기물을 파손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기막힐 정도로 신중하게 벽을 통과해 온다.

그들이라니? 그들은 ‘페르소나주’들이다. 그렇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다. p.9

책을 읽다 보면 이야기 속 비중을 적게 차지하는 단역부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까지 성격도 직업도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평소 나에게 그들은 그저 소설 속 인물일 뿐이었고, 드라마나 영화로 탄생했을 때 그나마 조금 가까워진 느낌을 받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소설 속 등장인물 ‘페르소나주’, 정말 살아있는 그들을 눈앞에서 만나는 경험을, 그것도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책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등장인물을 만나는 경험을 말이다.

그리고 그 등장인물이 탄생하는 과정은 또 왜 이렇게 멋진가?! 정말 한 편의 시와 같은 묘사력으로 펼쳐지니 빠져들지 아니할 수 없다. 144페이지라는 적은 분량이 주는 가벼웠던 마음은 줄어드는 페이지 수에 그저 아쉬움이 커져감에 따라 아껴 아껴 읽었던 책 「페르소나주」였다.




‘주인’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 비로소 일어나 움직이고 다른 인물들과 합류하며 온전히 ‘주인’의 손에서 탄생하는 그들.

종이색 피부를 선사받고 잉크에 젖는 생을 살아가니, 단어들은 살이 되고 동사들은 피가 된다. 더더더군다나, 우리도 모르지만, 그 역시도 자세히는 모르는 이야기를 선사받는다. p.16

그리고 단어로 만들어진 살엔 격정적이거나 비극적인 운명이 더해지고 각자 가지고 있는 피부가 틀리듯 독특한 개성을 구현하며 단어들에 혈색을 더해나간다. 그리고 끝으로 정신을 깃들게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이 모든 과정들이 꼭 신이 인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오며 한 자 한 자 음미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이름과 역할을 요구하기도 하고 작가가 정한 설정을 거부한다는 부분과 단어를 지배할 힘을 잃은 작가에 대해 한 사람은 여전히 사랑을 하는 반면 한 사람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떠난 ‘사랑의 종말’로 표현된 점이 흥미롭다. 정말 글쓰기의 은홍이 멀어지고 나면 그동안 오랫동안 교제하던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동안 함께했고, 안았고, 꼬옥 끌어안기까지 했던 몸을 떠나고 나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떠난 걸까? 변화를 좋아해서? 미발표작만을 좋아해서? 아니면 우리의 상상이나 우리의 문체에 질려서? p.110




소설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 등장인물이 탄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구현하는 등장인물과 맺는 관계를 이야기하며 글을 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이 옳게 읽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는지도 되묻는다.

이 모든 과정을 함께할수록 이 시대의 반 고흐로 불리는 실비 제르맹 저자가 탄생시킨 등장인물로 쓰인 소설은 어떠할지 궁금하고, 기대가 된다. 그리고 앞으로 어느 소설에서든 만나게 될 등장인물들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거 같다. 이제 하염없이 읽히기를 기다리는 등장인물들을 만나러 가보자.^^

등장인물들은, 혼란스러운 우리 정신의 문지방 앞에서 조용히 문을 두드리며 만인의 목소리를 전하러 온 전령사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전혀 다르게 읽히기 위해 하염없이 <침묵 속에서 울고> 있기 때문이다.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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