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목소리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
버넌 리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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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목소리

버넌 리 |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 p.246

때로는 진실이 거짓 같고, 거짓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낯설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분명함이 주는 불안과 강박이 나를 잠식해 통제권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매혹적이면서도 불안한 의혹의 지점을 지시하는, 소위 '두려운 낯섦'의 지점을 집요하게 소환하는 소설이 바로 버넌 리의 「사악한 목소리」이다.




이 책에는 국내에서 처음 출간된 헨리 제임스가 '지적인 만큼이나 위험하고 섬뜩하게 낯설다'라고 평가한 영국 작가 버넌 리의 세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첫 번째 이야기 「유령 연인」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혹시?!'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나중에는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이야기였다. 오래전부터 가문에 전해져 오던 이야기가 진실이라 믿으며 자신을 과거 속 오크 부인과 동일시하고 있는 현재의 신비한 분위기를 보이던 오크 부인과 거짓이라 말하지만 오히려 그 이야기에 사로잡혀있어 보이던 남편 오크 씨,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중심을 지키며 오크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던 화가가 들려주던 이야기.

이 세상에서 진실을 알아보는 방법이 따로 있나요? 아니까 아는 거고, 진실이라고 느끼니까 아는 거겠죠.

p.46

점점 망상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던 오크 씨와 화가와 달리 괴이할 정도로 매력적으로 변하던 오크 부인이 신비하고 기묘했던 분위기를 만나 몽환적으로 다가왔던 이야기였다. 정말 그 이야기는 진실이었을까?




광기에 가까운 사랑을 보이며 '경국지색'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했던 두 번째 이야기 「끈질긴 사랑」은 전 스티밀리아노 공작부인이자 우르바니아의 공작 귀달폰소 2세의 아내였던 메데아 다 카르피를 사랑하게 된 역사가의 일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300년 전 처형당했던 인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도 스물일곱 짧은 생 동안 다섯 명의 연인을 참혹한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여인을?!

그녀는 내 바로 몇 걸음 앞에 있었다. 그렇다, 메데아였다. 메데아 그녀였다. 착오도, 망상도, 사기도 아니었다. p.155

결국은 그녀를 만나기에 이르렀던 그는 그녀를 자신만이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자만하던 전 남자들처럼 변해갔고, 결국 그녀의 매혹에 빠져 파국에 이르는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 파국으로 향하던 길에서 마주했던 다섯 명의 연인들이 남겼던 말들이 유독 기억에 남던 이야기세 편의 이야기 중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야기였다.

아, 메데아! 그대의 애인 중에 나만큼 그대를 사랑한 자가 있었소?

p.165

당신은 그녀를 가질 수 없어! 그녀는 내 거야. 나만의 여자야!

p.171






마지막 바그너를 추종해 북유럽 남성 신화를 오페라로 작곡하려던 작곡가가 자신이 증오하던 음악에 오히려 그 증오로 인해 노예가 되던 이야기 「사악한 목소리」. 18세기 여성적 카스트라토, 불순한 인간의 육성이 만들어 내는 음악을 음란하고 추한 것이라 생각하던 그가 그 목소리를 뇌리에서 떨쳐버리려고 처절한 몸부림을 치던 그 과정들에 나도 모르게 공감하며 빠져들었던 이야기.

아, 사악한, 사악한 목소리여, 악마가 빚은 피와 살의 바이올린이여, 나는 마음 편히 그대를 저주할 수조차 없는 건가?

p.224

여자가 예술이나 역사, 미학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면 노골적인 경멸심을 드러내지 않고는 읽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필명을 쓴다고 말한 버넌 리 작가는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두 가지 정체성을 오가며 살았다고 한다. 제약이 많던 그 시대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던 저자의 모습이 작품에서도 느껴지던 이야기로, 두려운 낯섦과 중첩된 정체성의 공포를 만날 수 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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