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마요
김성대 지음 / &(앤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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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마요

김성대 | 앤드

한국장편소설/p.224

미라 같다. 속이 텅 비어 있을 거 같은.

미라의 걸음.

미라의 속도.

바람이 멈춘다. 빛이 멈춘다. 모든 게 멈춘다. 여자를 향해.

눈도. 숨도.

너다.

너였다.

p.8

한 편의 긴 시를 읽은 느낌이다.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김성대 저자의 첫 장편소설이라더니 역시 시인이구나 싶다. 쉼표 하나 없는 짤막한 문장들이 이어지며 이야기가 된다는 게 그저 신기하면서도 아리송하게 만든다. 연인과의 헤어짐, 유에포의 출현, 바이러스, 지구의 종말 등 급박한 소재가 감각적인 시적 표현들과 만나 잔잔한 파도 속에 있는 느낌을 준다.

‘나’와 ‘너’로만 나오는 주인공으로 인해 성별조차 감이 오지 않는다. ‘나’가 남자이고 ‘너’가 여자인가?!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마지막에서야 ‘아~~!’. 이미 책 소개에는 나와 있지만 혹 바로 책부터 보는 분들도 있을 수 있으니 이건 비밀 아닌 비밀로!




너는 사라지고 그 순간만 남았다.

어떻게 너를 놓칠 수 있었는지.

눈앞에서 잃어버릴 수 있었는지.

p.17

지구촌 전등 끄기 캠페인이 있던 날, 세계 곳곳에 동시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유에프오라고 추정되는 미확인 비행체처럼 어느 날 짐을 싸서 집을 나간 후 연락이 되지 않는 ‘너’는 ‘나’에게 미확인 비행체와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비행체로부터 긴급상황이라고 첫 메시지가 온 날 ‘나’도 ‘너’에게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전에 주고받았던 문자를 보며 문자 사이에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꼭 비행체가 보내온 메시지에 숨겨진 의미를 찾듯이. 그렇게 비행체와 ‘너’ 사이를 오가며 진행되던 이야기가 비행체를 비추는 드론 카메라에 잡힌 모래 위를 미라처럼 걸어가고 있는 ‘너’의 등장으로 나의 혼란이 시작된다.

네가 왜 거기 있을까.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P.25) 챕터 4에 쓰인 제일 첫 문장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거기서 뭐 하세요? 정말 왜 거기 있어요?'라고 시작된 의문은 설마 ‘너’라는 존재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너’가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이 되었나?!로 이어지며 급 머릿속이 바빠진다.

이 와중에 알려지지 않은 신종 바이러스가 등장하고 궤도를 이탈한 소행성으로 인해 지구의 종말까지 이야기되는데... 이 긴박한 상황 뭐지?!

현실 같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P.108

그리고 드디어 ‘너’에게서 온 문자.




실시간 종말이었다. 순간순간 다가오고 있는.

남은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 시간을 생각할 수 없었다.

p.171

책은 펼친 그 자리에서 다 읽긴 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와 ‘너’에 대한 이야기는 블랙홀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연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제외한다면 지금 현재 그대로를 담고 있는 세계관이었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뚜렷했던 이야기.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긴급 투여된 백신으로 부작용에 시달린다거나, 감염 증상보다 백신 부작용이 더 커져 백신에 대한 불신이 커진다든지, 수그러들 기미가 안 보이는 바이러스로 감염자가 계속 늘면서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황들이 꼭 현재를 보는 듯했다. 단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바이러스만 다르다.

하지만 그 바이러스가 애완동물로 이어져 사람들이 기르던 개를 버려 개들이 버려진 장소에서 한곳만 바라보고 한 사람만을 기억하며 기다리던 장면과 가축들이 땅속에 묻혀 살처분되던 장면들은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 모든 상황들을 작가 특유의 짤막한 문장으로 그리며 계속 감정을 건드려 온다.

그래서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소행성 충돌로 인해 종말이 오는 상황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고, 내가 그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도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몰려오는 공포감에 미리 자신의 생을 마감하던 그들처럼 될까?

PS. 책 제목이기도 한 「키스마요」는 소말리아에 있는 항만도시란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지 궁금하다.

키스마요, 인상 깊은 글귀

▶ 나 없이 여기 있을 수 있어? 나 없이도 있을 수 있지?

네가 갑자기 물었다. 눈을 마주 보면서.

네가 왜 없어......? p.23

▶ 문자는 뒷걸음쳤다. 마침표는 마칠 후 없는 데 놓아고. 쉼표는 쉴 수 없는 틈을 파고들고. 아무 실마리가 없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너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걸.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p.27

▶ 꼭 자신도 이 신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 몸에 힘이 없었다.

네가 사라지고 나는 중력을 잃었다. 네가 사라지고 알게 되었다. 네가 나의 중력이라는걸. 내가 없었을까. 너의 중력에는. p.52

▶ 너의 눈이 투명에 물들어 갔다. 내가 보이지 않았다. 네가 바라보는 곳에 나는 없었다. 마주 보고 있는데 눈이 비어 있었다. p.56

▶ 모래 위에 너의 발자국이 돋는다. 발자국이 이어진다. 외계 비행체를 향해. 눈을 못 돌리겠다. 화면에서. 발자국이 끊길까. 네가 사라질까. p.61

▶ 혼자 있으면 내가 없는 거 같았다. 네가 없으면. 네가 있어야 나도 있는 거 같았다. 내가 되는 거 같았다. p.93

▶ 여기 있을게. 너와 나 사이에. 지금은 닿지 않지만. 눈 감지 마. 안 보인다고. 귀 막지 마. 안 들린다고.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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