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막는 제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7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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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막는 제방

마르그리트 뒤라스 | 윤진 옮김 | 민음사

세계문학 / p.394

자신의 인생을 받친 대가로 받은 건

그저 바람 그리고 물뿐이었다.

프랑스 현대 문학에서 독보적 위상을 차지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저자의 책을 만났다. 삶의 고통을 섬세하게 묘사한 '뒤라스적 글쓰기'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라니 기대가 된다. 무엇보다 원어 낭독으로 먼저 만났던 책이었기에 더없이 반가웠고, 책을 읽는 동안 감미로운 프랑스어가 들려오는 듯했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도 예전에 읽은 '배움의 발견'이 계속 생각났다. 독실한 모르몬교 가정에서 태어난 타라가 정부를 믿지 못하는 아버지 아래 공교육을 받지 못한 채 16년을 살다 케임브리지대 역사학 박사가 되기까지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그 책이. 분명 다른 이야기임에도 태평양을 막는 제방 속 그들이 보여주던 광기와 폭력이 비슷해 보였던 걸까?

책을 다 읽고 보니 책 제목이 정말 내용 그 자체구나 싶다. 그리고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쉬잔이 아닌 그녀의 어머니였을지도... 책이 출간이 되고 나서 책 내용이 사실을 왜곡했다며 격노한 어머니, 그리고 결국 결별한 둘. 어디까지가 실화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이야기이다.



당신들은 내 인생의 십오 년, 젊음의 십오 년을 바쳐 모은 돈을 받고 나서 무엇을 줬나요? 소금과 물뿐인 사막이었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들에게 건넸죠. 마치 내 몸을 제물로 바치는 기분이었고, 그렇게 바쳐진 내 몸에서 내 아이들을 위한 행복한 미래가 꽃 피어나길 기원했습니다. 당신들이 받은 건 그런 돈이었습니다. 그 봉투 안에 내가 모은 돈 전부가, 나의 모든 희망과 살아갈 이유가, 십오 년 동안의 인내가, 나의 젊음이 송두리째 담겨 있었단 말입니다.

p.294

한때 교사였던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쉬잔과 조제프를 건사하며 15년 동안 열심히 모은 돈으로 식민지 토지국에 토지 불하 신청을 해 땅을 받는다. 하지만 그 땅은 매해 밀려 들어오는 바닷물로 인해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하지였다. 자신의 젊음이 태평양의 파도 속에 던져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어떻게 해서든 무엇이든 경작해 보려 했던 어머니는 결국 대출을 받아 제방을 세우려고 했고, 그 계획에 평야의 농부 수백 명이 온 힘을 쏟아부으며 광적인 희망을 가지고서 함께 제방을 쌓아 올린다. 하지만 그 제방 또한 단 하룻밤 사이에 태평양 파도의 가차 없는 공격으로 무너져 내린다.

이 땅을 사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모든 즐거움을 희생했던 어머니, 그녀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 땅을 태평양의 물이 평야를 마음껏 적시도록 내버려 두기까지의 고통이 그녀를 병들게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그녀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이지 않은가?! 그녀가 쉬잔과 조제프에게 가한 폭력과 폭언이 이로 인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망상에 사로잡힌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떠날 수 없었던 쉬잔과 조제프였고, 조제프는 유일하게 쉬잔에게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되었으며 어느 날 부유하지만 외모는 아니었던 조 씨의 등장은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희망이 된다.



무너진 제방처럼, 죽어 버린 말처럼

저 남자 역시 불운일 뿐이다.

아무도 아니고, 그저 불운이었다.

p.75

쉬잔에게 반해 구애를 하는 조 씨에게 결혼하기 전까지는 쉬잔과 자지 못한다며 결혼을 강요하는 어머니와 조제프. 조 씨는 투명한 존재였고, 짜릿한 돈의 약속을 엿보기 위해 거쳐 가야 하는 얼굴일 뿐이었다. p.104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면 어김없이 조 씨가 문을 두드린다. 문 좀 열어봐요, 쉬잔. 열어 봐요. p.106

쉬잔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조 씨이지만 내 눈에는 그저 욕망으로만 보인다. 조 씨 그대로의 자신에게 쉬잔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돈이 가진 능력을 이용했고 축음기를 선물함으로써 늘 문을 두드리는 그였고 그녀도 그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줬다. 점점 애타는 마음에 측음기보다 몇 배나 비싼 다이아몬드까지 주는 그의 마음이 정말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이아몬드를 쉬잔이 받은 것을 보고 숨겨놓던 어머니는 보석처럼 역겨운 건 없다며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말하더니 쉬잔을 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조제프는 지켜만 본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의 폭력이 행사될 때면 헉! 한다. 그리고 의문만이 가득해진다. '왜?' 조 씨와 자지 않았다고 해도 어머니가 계속 때리자 결국 쉬잔이 조 씨와 잤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네가 그런 아이가 아닌 걸 안다면서 또 때린다. 왜?

쉬잔이 조 씨와 결혼만 한다면 조 씨에게서 돈을 구해 제방을 다시 쌓고 방갈로 공사를 마무리하고 자동차도 바꾸고 조제프의 이도 치료해 줄 생각이었던 어머니, 이 모든 계획이 지체되는 건 쉬잔의 책임이라 생각하는 어머니. 다이아몬드가 어머니의 내면에 억압된 감정을 건드리며 그 감정에 못 이겨 쉬잔에게 달려들었다는 설명이 있었음에도, 제방의 전후 사정을 알고 있음에도 이해는 되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그려졌다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이야기. 조 씨로부터 측음기와 다이아몬드를 받으면서도 오빠가 누릴 즐거움을 떠올리던 쉬잔은 친오빠 이상의 감정을 가진듯하다. 후에 카르멘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떠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청춘기에 사랑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한 저자 뒤라스의 분신들이라고 할 수 있는 「태평양을 막는 제방」와 「연인」 , 이제는 일흔에 쓴 「연인」을 읽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으려나?

태평양을 막는 제방, 인상 깊은 글귀

사실 아이들은 죽어야 했다. 평야는 좁았고, 여전히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바다는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물러나지 않을 터였다. 바닷물이 어디까지 올라오든 아이들은 악착같이 태어났다. 그래서 아이들이 죽어야 했다. p.120

다이아몬드는 다른 세상에 속했다. 다이아몬드는 과거와 미래를 매개하는 물건이었다. 미래를 열고 과거를 봉인하는 열쇠였다. p.129

어머니는 방조 제방과 은행과 자신의 병과 방갈로 지붕과 피아노 교습과 토지국을, 자신의 늙음과 고단함을,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p.139

안락한 생활이 주는 놀라운 여유를 드러내는 전체적인 움직임 속에서 몸짓 하나하나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에 반해 쉬잔은 우스꽝스러웠고, 눈에 띄었다. p.191

어머니의 불행은, 결국, 뿌리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야.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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