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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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간략 소개

『우리는 같은 곳에서』는 여덟 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한 박선우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성소수자 퀴어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이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내적 갈등과 심리적 폭력과 대립 등 소수자의 내면을 서로를 알아가며 느끼는 설렘보다 그 관계 속에서 느낀 질투, 망설임, 후회, 무력감 등 조금은 어두울 수 있는 감정을 다양하게 이야기 속에서 섬세하게 전달한다.

 

분명 서로가 이야기하는 대화체인데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장부호가 없다. 그런데도 인물이 서로 이야기하는 대화가 정확하게 그려지면서 어느 부분이 서로의 대화이고 어느 부분이 혼자만의 생각인지 물 흐르듯 읽힌다. 읽을수록 신기했다

 

 

인상 깊은 구절

 

무릇 관계란 오래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르고 허술해지기 마련이다. 영지는 어쩌면 우리도 이런 식으로 느슨해지다가 한순간에 툭 끊어져 버리고 말겠지, 별것 아닌 일을 계기로 영영 볼 수 없게 되겠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p.61

 

 

언어라는 것이 고작 이렇구나. 16이라 말해도 27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16인 줄만 알다가 27에 당도해서는 왜 27이고 난리야……하면서 서로를 원망하고 갈라설 수도 있는 것이구나.

p.112

창가에 부착된 버튼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STOP'이라고 적힌 글자 아래로 연보랏빛 램프에 불이 들어왔어. 그제야 알았다. 이 세상에는 누를 수 있는 버튼들과 그 순서가 정해져 있는데, 멋대로 하나를 건너뛰어버리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 그 버튼을 누를 수 없다는 걸 말이야.

p.196

물론 나중에서야 이경은 깨달았다. 그토록 죽음과 곤궁함을 가까이에서 느끼던 시절만이 가장 사는 것처럼 살던 시절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p.203

마무리하면서...

한 편 한 편 끝이 날 때마다 여운이 길게 남았다. 닫혀있는 결말보다는 열려있는 결말이라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게 되어서 일까? 밤바다를 하염없이 보다가 나도 모르게 밤바다에 들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오묘한 소설책이었다.

이별로 인한 분노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피스텔 보증금까지 빼 해외여행을 하다 머무를 곳조차 없어지자 성소수자 동아리에서 만난 그를 누나가 데리고 오면서 친동생과 만남이 그려졌던 '밤의 물고기들', 영문도 모른 채 버려진 강아지처럼 암담함을 기억하는 영지와 한때 사귀었지만 지금은 여자라거나 친구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만남을 계속해오던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 '우리는 같은 곳에서', 일상 속으로 찾아온 옛 여인이 정말 실제로 찾아온 건지 주인공의 환상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빛과 물방울의 색' 등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그중 본인의 시점이 아닌 누나의 시점으로 본 퀴어의 내면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책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의 성별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다. 첫 문장을 쓰기 전까지 소재도 플롯도 아닌 주인공의 성별을 고심했다는 작가는 이 책 『우리는 같은 곳에서』를 쓴 후에는 '나'의 성별을 고민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수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그들과 어떻게 함께 나아갈 건지 생각을 해보며 또다시 한번 읽어보았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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