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4월 2주

  참고로 이 영화들을 추천하는 본인은 불교신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나름 존경하는 불교인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희생,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종교인들은 종교의 차이를 넘어 존경해야 합니다. 선행을 이끄는 힘이 종교의 힘이라면 확실히 종교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 추천할 작품들은 모두 천주교와 관련된 작품들입니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믿는 분들이 공통된 분이란 것은 있지만 양쪽은 중세가 끝날 때, 각종 종교 전쟁으로 서로를 증오하며 싸운 지 오래이고 지금도 그들은 믿음의 대상은 같지만 믿는 방법은 다릅니다. 즉 개인적 판단으로 천주교(가톨릭, 혹은 구교)와 기독교는 다르다고 판단합니다. 천주교의 믿음체계와 세계를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마도 이 영화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아무튼 지금 소개할 작품들은 천주교의 기적과 선행에 관한 영화입니다. 왜 이런 영화가 현재 많은 관심을 얻게 됐을까요? 그것은 오늘의 삶이 힘들지만 많은 이들이 이런 것에 무관심하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기적을 원하고 선행을 하는 이들이 매우 반가운 것입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누군가의 행복이 가능하다면 몸을 던지더라도 그런 희생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값진 희생이고, 종교인이어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불교계에 이런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영화화가 된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불교는 아마도 성찰 위주의 영화에 많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종교는 힘든 자들의 새로운 희망을 줍니다. 그것이 기적의 형태이든 누군가의 선행이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종교의 가치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불교인이지만 천주교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것은 비뚤어진 종교적 맹신 때문에 종교의 기본적 가치까지 망각하고 있는 어느 종교인들의 실책이 문제점을 계속 양산하는 이 시점에서 그것은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루르드
 

 


  이 영화가 과연 천주교의 기적에 대해 정확하게 답변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관객들은 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독실해 보이지 않은 신자가 왜 기적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해야 할 답이 나와야 할지, 아니면 믿음이 강해야 기적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식의 반론을 제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천주교에서 말하는 기적에 대한 실마리는 분명 주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휠체어를 탔다는 것은 분명 신체적 불행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되고, 운명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은 높을 것입니다. 당연히 주인공 크리스틴은 고통스런 나날을 보냅니다. 자신의 불구인 신체에 대해 불만인 그녀가 이상한 인연으로 성지 루르드로의 여행을 떠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만난 자원봉사자에 대한 부러움 등으로 볼 때, 크리스틴은 전혀 천주교답지 않은 그저 그런 여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자에게 찾아온 종교적인 만남과 신앙의 부활, 그리고 기적 등을 보면 종교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네요. 23회 유럽영화상(2010) 수상유러피언 여우주연상(실비 테스튀), 59회 멜버른국제영화제(2010) 초청국제파노라마(예시카 하우스너), 47회 비엔나국제영화제(2009) 수상비엔나영화상-장편(예시카 하우스너), 25회 바르샤바국제영화제(2009) 수상바르샤바 대상-국제경쟁(예시카 하우스너) 등의 수상으로 본다면 이 영화, 뭔가 느낄 수 있는 영화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울지마, 톤즈 



  이 영화, TV에서도 중계된 이후에도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라는 표현을 본다면 주인공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천주교 신부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희생과 봉사의 상징인 슈바이처의 이름을 본다면 그가 어디에서 활동했고, 봉사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의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가 이태석 신부의 봉사 장소입니다. 이 지역은 여러 면에서 독특한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그곳의 주류인 딩카족은 키가 매우 큰 종족이며, 전투적 민족이란 특성으로 인해 눈물을 수치로 여깁니다. 언제나 강해야만 한다는 딩카족의 특성은 남북으로 갈라져 내란에 휩싸인 수단에겐 가장 효과적인 삶의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은 황폐화됐고, 인성은 메말랐으며, 삶의 환경은 척박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고 이태석 신부는 그곳에서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그 지역엔 어렵지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영화는 그의 이런 삶을 추적합니다. 특히 남 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 밴드가 마을에서 만들어지고 행사를 뛰는 모습에서 척박한 현실에서 새롭게 태어난 딩카족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각종 기부행사를 뛰며 어려운 곳을 희망의 장소로 바꾸려는 고 이태석 신부의 모습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통기타를 치며 기부활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고 이태석 신부가 마흔 여덟에 세상을 떴을 때, 눈물을 수치로만 여겼던 전사부족 딩카족의 눈물의 배웅은 희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새겨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바보야
 

 


  한국 2009년 2월 어느 날, 그날은 매우 추웠습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에서 잊을 수 없는 거인을 담은 운구를 담은 행렬을 추위는 막지 못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서 한국인의 어렵고 힘든 곳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했고, 모든 것을 헌신한 故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영화 ‘바보야’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안성기 님이 목소리를 맡은 이 영화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의 많은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생존했던 한국은 남북한으로 분열됐고, 명동 성당은 언제나 민주화 물결 속에서 구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경찰에 쫓기는 자들의 피신처였습니다. 그 명당 성당의 추기경으로서 그는 당당히 독재정권에 대항했고, 그의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안위를 걸어야만 했던 위험한 것들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루고 독재정권이 물러서면서 그의 헌신이 결실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활동 이외에도 그는 신부라는 종교인으로서 많은 이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다했습니다. 어려운 이들의 희망이었고, 언제나 어려운 자들 옆에 서려 했습니다. 비록 말년에 그의 독재에 대한 말이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헌신과 희생을 그런 것으로 평가절하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의 인생을 보여주면서 오늘을 살고 있는 종교인의 참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이 너무 슬프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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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사악한 자본주의 영업사원의 좌충우돌 코믹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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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하의 첫 영화 나들이? 아마 그럴 것이다. 요즘 아이돌 가수 치고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외도를 안 하는 것이 인기 없다는 반증일 상황이니 인기 있는 윤하라면 당연히 영화든 드라마든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혹시 드라마에 나왔는데 챙겨보지 못한 내가 아닐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 영화에서 연기하는 윤하는 처음이다. 그런데 주인공도 아니고 하니 윤하의 연기력을 따지거나 비중을 따질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영화는 노래 부르는 가수 중심이 아닌 위기에 빠진 한국 서민들의 현실과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난다는 환타지물이니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보는 관객들에겐 다행인 마지막이다. 사실 보기도 전에 영화 포스터나 기타 등등의 사전제작물들을 본다면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하도 많아서, 그렇게 끝나는 것이 당연한 공식처럼 되고 말았으니까. 그래서인지 최근 영화 감상법에서 마지막까지 가는 과정 자체가 좋은 그림이 되야 하고, 좋은 서사가 되어야 하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 수 있는 배경도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세상과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은 너무 슬펐다. 남의 일이라고 하기엔 등장인물들이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 같았고, 그들의 사연 역시 시대가 그래서인지 있을 법한 사건들이었다. 영화가 대중성을 확보하려면 이런 비극적인 사건들을 극적으로 해피엔딩해야 하기에 결국 모두가 행복하도록 끝을 맺었다.
  영화 속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사연이 현실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힘들었던 그들이 성공하는 장면들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냥 성공 다음의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왜 이리 건너 뛰었을까? 어쩌면 극작가나 감독도 어떻게 해야 그들이 극적으로 성공할지 방법을 모를 것이다. 신이 아니라면 1년 만에 금나와라 뚝딱 하는 마법을 어떻게 해야 부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리라.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보기는 좋았다. 비극이 비극으로 끝날 때의 아픔을 이미 관객들은 알고 있었고, 그런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 역시 관객들 중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현실에서의 희생양이 된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유야 어떻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서로 보기 좋을 뿐이다.  

 

 
  감정이입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성공이 왠지 모르게 반갑고 즐거운 이유가 말이다. 하지만 이런 성공이 뒷받침된 배경은 사실 암담한 것들이다. 영화는 잔인한 자본주의 관계를 기반으로 성립된다. 보험이란 것은 좋게 말하면 위기일 때, 고통의 양을 줄이거나 삭제해주는 서비스를 해주는 대행업인데, 문제는 이들이 돈 버는 방식이다. 자신의 고유업무라면 누군가의 고통을 누구보다 먼저 챙겨줘야 하지만 민간업자들이 맡고 있는 이런 대행사인 보험사들은 돈 준 피보험자들이 사고 안 나길 바라고 있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들이 사고 안 나길 빌면서 그 차익으로 생활하고 돈 버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고객들이 사고 안 나길 빌고, 그러기에 사고 나지 않을 사람들, 즉 잘 사는 사람들이나 무병장수하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한다. 그러니 오늘 내일 하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맞을 생각도 없고, 자살할지 모른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맞을 리도 없다. 잔인한 자본주의의 생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기업이 바로 보험사인 것이다. 그런데 어느 바보 같은 보험영업인이 언제 죽을지, 아니 조만간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을 고객으로 유치하고 만다. 이유는 뻔했다. 실적위주의 세상이다 보니 그런 무리수를 둔 것이다. 실적이 있어야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고 좋은 성적도 거둬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이 뒤엉킨 세상으로 진입한다.
  보험사 영업이란 것은 자본주의의 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직업이다. 결코 천사일 리가 없는 어느 보험 영업사원이 자신의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천사로 변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선의, 이런 역설로 인해, 생활고로 인해 위기에 빠진 이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어리석은 탐욕이 천사로서의 역할을 한 이 아이러니를 담은 영화, 정말 신선한 신데렐라 이야기다. 그것도 무려 네 명이나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결코 자본주의의 선의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도리어 비판한다. 그들을 살린 것은 결코 자본주의의 혜택이 아닌, 그나마 어쩔 수 없는 선의라고 해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뛴 보험사 영업 사원 덕분이다. 그 영업 사원 역시 자본주의 앞에서 허덕이며 사는 어느 빈곤층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어떻든 천사는 될 수 없는 이념일 뿐이다.
  힘든 사람들끼리의 연대? 그럴지 모르겠다. 의도하지 않은 선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들고, 외롭고, 비참해도, 죽어야 돈 버는 보험사기 앞에서도 살아가야 할 이유는 많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가족이 있고, 관계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만들어서 행복해할 사람은 사실 없지 않을까? 산다면 어떤 기회가 있을지 누가 알까?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있을 확률도 있지 않을까?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면 포기하지 않을 때 작은 것이라도 있을 수 있다. 포기하지 않을 때 기댈 수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살아갈 이유는 있을 것이다. 죽으면 그마저도 포기해야 하니까. 

  

 

  윤하의 연기력은 좋은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니 영화에서의 노래 부르는 모습도 좋았다. 어쩌면 뛰어난 연기자 윤하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류승범의 연기력은 분명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한국 최고의 양아치 연기자로서 자리매김했고 코믹연기에서도 나름 입지를 구축한 그가 이번 주인공 역에서 역시나 발군의 능력을 보여줬다. 그는 코믹과 우수를 동시에 겸비한 몇 안 되는 한국 연기자이다. 역설적인 두 개의 불협화음이 공존하는 그런 캐릭터 말이다. 그러기에 이번 영화가 그 덕분에 더욱 잘 빛이 난 것 같다. 사악한 자본주의 전도사란 악당이 어쩔 수 없이 착해야 하는 천사가 되는 과정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과연 그란 생각이 든다. ‘주먹이 운다’에서의 강렬한 인상이 코믹과 함께 승화한 그런 연기력이었다. 앞으로 그의 발전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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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4월 1주

  인간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제도는 결혼이다. 기본적인 인간관계인 결혼이 그런데 요새 이런저런 이유로 위기를 겪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결혼과 관계된 영화들이 주목을 받고 있고 의미심장하기조차 하다. 남과 여가 있어야 이루어지는 결혼, 그러나 사연도 많고, 갈등도 많다. 영화야 해피엔딩으로 끝나더라도 결혼 과정은 산 넘고 물 건너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재미있겠고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도 담고 있다. 그래서 결혼 이야기가 단순한 남녀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또한 한국영화에선 드물지 않게 결혼을 위기로 빠뜨리는 것은 남녀간의 사랑과 갈등이 아니라 남녀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대다수다. 한국에서 결혼이 단순한 남녀의 문제가 아닌, 집안 대 집안의 관계를 만드는 것으로 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외국 영화가 꼭 예외는 아니다.
  말들이 많은 결혼에서의 갈등 이야기, 최근의 영화에서 그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이혼도 많아지고 아기들도 줄고 있는 지금, 한국은 미래의 고령화 위기 등으로 앞으로 큰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면 영화라도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멋진 해피엔딩이 정말 현실이 됐으면 한다. 사랑이 좋은 결실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한다. 
 

못말리는 결혼 (2007)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전통화 현대의 충돌은 영화는 물론 소설 같은 예술에서도 자주 차용하는 갈등구조다. 좀 구태의연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큼 갈등구조가 명확한 것도 없다. ‘못말리는 결혼’은 전통적인 가문과 현대적인 가문 사이에 벌어진 상견례에서의 진통을 보여준다. 웃음 코드를 삽입한 영화이지만 사실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은 무거운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결혼에 전제로서 부모의 경제력과 재산, 그리고 직업 등이 두 가문의 싸움의 빌미가 된다. 또한 강남과 강북의 대립 역시 새로운 지역주의의 갈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오늘을 사는 많은 청춘남녀들에겐 절실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들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 이것은 신데렐란 영화로 언제나 봉학되긴 하지만 사실 양가 부모 이전에 결혼을 준비하는 남녀 둘 사이에서도 가장 큰 고민거리다. 아무튼 영화는 이런 것들을 갖고 돈 안 되는 전통이 과연 필요하냐는 문제로 티격태격 싸우는 재미가 이 영화의 볼거리다. 특히 주인공 남녀로 출연한 유진과 하석진의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김수미와 임채무의 뛰어난 연기력이 더욱 빛이 났다. 이 영화는 결혼에 관한 한 고전이 될 뛰어난 작품이란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영화다.   

 

미트 페어런츠 3



   마침내 3편까지 나온 이 영화는 1편부터 3편까지 결혼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웃음코드를 통해 그 모든 것들을 묻고 있는 것이다. 능력 없는 사위에 대해 영화는 정말 비현실적으로 장인의 온갖 저주를 보여준다. 결혼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영화 3편에서도 전직 CIA 요원 잭이 사위 그레그를 탐탁하지 않게 여긴다. 그것도 10년이나 된다. 개인주의가 사회적 도덕 이념으로까지 자리잡은 미국이지만 이 영화에선 그런 미국적 통념이 통하지 않는다. <미트 페어런츠>(2000)에서 예비 신랑으로 고된 신고식을 치렀고, <미트 페어런츠 2>(2004)에서 위험한 상견례까지 무사히 마쳤으면 끝날 만도 한데 말이다.
  그레그가 영화 속에서도 마음에 그렇게 드는 구석은 없다. 무엇보다 경제적 무능력이 가장 큰 원인인데 한국이나 미국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는 경제력인가 보다. 영화에서의 갈등은 그런 무능한 사위를 어떻게든 자기 딸과 갈라서게 만들려는 장인의 어이없는 모략이다. 그런데, 사위, 이전 영화에서의 약함은 사라지고 이번엔 당당하게 장인에 도전한다.
  영화의 웃음코드가 장인과 사위의 한판 대결 정도로만 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독립된 자아를 찾아가는 자유의지의 구체화 정도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내용과 주제는 미국 영화의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겠지만 결혼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좀 흥미롭다. 미국사회에서도 결혼은 개인간의 관계가 아닌 집안이 결부된 것임을 이 영화로도 알 수 있는 것을 보면, 결혼, 참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기도 함을 느낀다.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력도 무척 반가운 영화다. 


위험한 상견례


  해방 이후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의 갈등 중 최대의 것은 단연코 지역주의다. 특히 경상도가 독재정권의 산실이 되고, 전라도를 왕따 시키는 전략으로 정권을 오래 유지해온 전략 덕분에 경상도와 전라도는 언제부터인가 태생적으로 경쟁하고 증오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작은 국토에서의 이 두 지역의 갈등은 한일관계만큼 악화되고 말았다. 여기에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의 전두환 정권의 만행은 어쩌면 이 영화의 갈등구조까지 만든 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영화 ‘위험한 상견레’에서 그런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다. 다행히 웃음코드였기에 망정이지 좀 더 심각한 영화에서 나왔다면 심각하게 분노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의 결혼, 시작부터 만만한 결혼이 아니다. 그것도 21세기가 아닌 1980년대라면 지역간 갈등이 가장 심하던 시대였다. 다만 21세기의 특성이라면 당시의 남녀의 통념과도 다르게 여자가 적극적이고 남자가 어눌한, 당시의 남녀관계가 아닌 오늘의 관계를 빌린 것이 그나마 현대적이다. 아마도 과거를 빌려 오늘을 비추어 보려는 속내를 읽을 수 있다. 이 영화 역시 해피엔딩이기에, 아니 그런 것 이외엔 달리 마지막 구성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어떻든 전라도든 경상도든 작은 한반도, 그것도 반쪽인 상황에서 정치적 이권과 탐욕, 그리고 그에 따른 무시로 인해 갈라졌어도 다시 뭉쳐야 살 수 있는 운명을 지닌 곳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언제까지 지역주의 망령으로 갈등을 하고 살 수는 없어야 한다. 한국은 바야흐로 빈부의 격차로 인한 갈등이 심해지고 고령화에 따른 세대간의 갈등까지 더해지는 상황이다. 이럴 때,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현실 극복의 방법이 의미심장할 것이며,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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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 백 - The way back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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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먼지 모르겠다. 시베리아에서부터 인도까지 6,500km라는 거리 말이다. 인간의 한계처럼 경험하지 못하면 느낄 수 없는 감각적인 한계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여지없이 발생했다.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의 서사를 보게 되면서 멀고 험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화려하기 그지 없는, 그리고 잊기 힘든 멋진 여행 코스가 될 수도 있지만 탈주여행을 하는 도망자들에겐 그런 생각은 사치다. 목숨을 건 사투 속에서 마지막까지 위험에 처하면서도 끝까지 도망해야 하는 여행은 결코 낭만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한 여정을 담은 이 영화 ‘웨이백’은 그렇게 위기에 처한 이들의 각별한 사연이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베리아 수용소로 간 사람들의 사연은 다양하고 기막힌 것이다. 범행으로 인해 갇힌 것이기보단 정치적 이유로 그들이 수용소로 보내진 것을 보면서 정치적 패배자의 말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조선의 역사에서 당쟁으로 인해 희생된 자들은 그들의 범행이기 이전에 서로간의 철학과 이데올로기가 달랐다는 이유로 범죄인이 되고 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한다면, 소련의 시베리아 수용소 역시 그런 이유로 가게 됐음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억울함이며, 자유를 빼앗긴 불필요한 이유인 것이며, 그래서 자유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는 그래서 떠나야 할 장소며, 자유의 가치를 알기에 목숨을 각오하며, 탈출해야 할 장소인 것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어느 인간의 외침이 생각나는 장소이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련과 히틀러 독일의 침략으로 점령된 폴란드는 슬픈 역사의 희생양으로 기억된다. 그런 폴란드의 국민이라면 당연히 박탈을 쉽게 당할 것이며, ‘’야누스(짐 스터게스)가 그런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소련의 점령에 위험인물로 여겨졌기에 인간이 살기 힘든 최악의 조건인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졌다. 하지만 거기엔 자신이 사랑했고 믿었던 아내의 밀고가 있었다. 가장 사랑한 이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아내의 입장을 이해했고, 자신의 영원한 아내로 생각했고, 그가 어쩌면 힘든 여정을 버틴 힘이 된다.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의 연약한 믿음이 그를 강하게 만든 힘인 것이다. 그녀를 만나야겠단 의욕, 그것이 이 영화 서사의 시작이다.
  하지만 영화 속엔 야누스만 있지는 않는다. 그와 함께 도망한 이들은 각자의 사연과 용기로 힘든 여정을 하게 되며, 이들의 복잡하고 힘든 인간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여행은 명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행되지 않고, 위험과 막연한 목적지에 대한 어려운 선택 속에서 진행된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간의 불신이 있기도 했으며, 상대를 희생해야 내가 살 수 있단 위험한 고려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인간으로 이루어진 집단에선 흔한 생각들이며, 인간의 한계로 자주 지적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인물들은 그런 것들을 어렵게라도 극복하면서 탈주의 여정을 계속 진행한다. 그런 가운데 싹트는 믿음과 인간미, 그리고 결코 서로를 버리지 않은 어려운 결단들로 인해 영화는 강한 감동을 주게 된다.
  가는 과정은 그들이 걷는 과정만큼 어려웠다. 그런 여행엔 언제나 슬픔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다른 선택을 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만남 뒤에 이어지는 헤어짐은 뭔지 모를 숙연함을 자아내며, 왠지 모를 서글픔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별은 확실히 슬픈 과정임이 드러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그런 아픈 사연 속에서도 마지막으로 일궈내는 탈주자들의 성공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안도감을 줬을 것이다. 비록 그런 성공 뒤에 숨겨진 사연들 역시 애달픔을 주긴 하겠지만 말이다. 
 

 

  영화는 그러나 인도로의 여행만이 주인공의 여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끝없는 역사라는 인간의 시간 속에서 세상의 변화가 있었으며, 그런 분주한 변화 속에서 주인공 야누스의 여정을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여정을 마지막으로 끝내는 마지막 장면은 여러 가지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인간으로서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지막 여정은 바로 인간관계의 회복임을 영화 마지막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화면은 정말 아름다웠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자신들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도망자들이 걷고 있는 풍광이 더없이 아름다웠고, 추운 겨울 산에서부터 더욱 사막의 모습은 분명 고통의 장소였겠지만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압도하는 매력을 보여줬다. 영화의 서사를 외면한 채 봤다면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자연환경에 인간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된다. 불신으로 가득했던 처음의 탈주자들의 모임이 믿음과 희생으로 가득한 참다운 인간집단으로 변모하는 것은 여행에서의 자연의 화려한 모습들만큼 반가웠다. 인간의 마지막 희망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로 보였다. 미국인 정치범인 스미스(에드 해리스)가 ‘여기서 친절은 널 죽게 만들 거야!’라는 냉소 섞인 이야기는 탈주범들이 여행하는 내내 그들을 괴롭힌 엄연한 현명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희망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열망에 다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의욕이 그들을 함께 하도록 했고, 영화는 그런 믿음으로 인해 도망가는 여정에서 강한 결속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어쩌면 관객들이 보고 싶었던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The Way Back’이 실화에 근거한 영화란 것이 매우 반가웠고 고마웠다.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이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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