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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스트우드의 고집스런 모습은 과거의 마카로니 서부극에서의 모습관 전혀 달랐다. 여자권투선수의 체육관 관장도 그런 모습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런 그가 대했던 영화 속의 세상은 50년대 한국전쟁을 겪었던 시절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는 백인우월의 Town 중심의 세상에만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미국은 과거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이민자의 범주가 백인에서 흑인, 라틴계, 그리고 아시아계로 훨씬 확장됐다. 그래서 많은 마찰이 빚었다.
그의 이웃은 중국의 마어쩌뚱 등장 이후 중국에서 도피한 아시아 몽족이었고, 이민계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라틴계가 미국을 자신의 것인 냥 휘젓고 다녔고, 힙합과 같은 흑인문화에 취한 미국인이 있었지만 정작 흑인들은 그런 백인을 맞이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폭행만을 일삼았다. 그렇다고 일종의 아시아갱단에서 보듯 아시아계가 그리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과의 최악의 관계가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Mr. 왈러스키 역시 백인이라고 자처하지만 그 역시 폴란드 이민이었으며 백인이라도 이태리계 역시 그 옆에 존재했다. 즉 백인이라 해봐야 다 이민계였으며 미국은 그렇고 그렇게 뭉치고 사는 장소였다. 일종의 반전이 될 것이지만. 어쩌면 미국에 처음 발을 들여 논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내쫓은 경력까지 고려한다면 미국구성원들 중 이민자 아닌 사람을 없는 것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영화는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이민계 사회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사는 묘약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Mr.왈러스키에서 월트 할아버지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무척 험난했고, 그런 와중에 그는 다양한 충돌을 겪어야만 했다. 자식들과의 연대는 한없이 약화되었고 손자들로부턴 그는 경원시되기까지 했다. 가족에게선 아무 필요가 없는 존재로 하락한 그지만 미국의 주인이란 자부심과 과거 한국전 용사란 자긍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 와중에 변한 미국에서의 충돌은 상당수가 인종간에 발생했고 그런 상황에서 비록 백인인 그였지만 Township이란 주민의식의 발현으로 돕게 되고 그런 사건들로 인해 이민족인 몽족 가족과의 자연스런 접촉과 포용하려는 감정을 갖게 된다. 바야흐로 미국 이민의 외연의 확대가 월트 할아버지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Mr.왈러스키라는 엄격함에서 월트 할아버지란 이웃 할아버지로 발전해 가는 과정은 새로운 이웃을 받아들이고 있는 한 인간의 변화를 결과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꼭 같은 백인들이란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차별이나 외면은 테두리를 좁힘은 물론 결국 고립과 몰이해란 비극을 잉태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목적은 모두의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고 모두의 행복 속에서 개인의 행복도 가능함을 이 영화는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공동체 문화는 결국 월트 할아버지의 타인을 위한 살신성인의 희생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죽음을 맞이한 시한부 인생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바꿔준 이웃을 위해 큰 선물을 해준 것이다.
이런 이웃들 뒷편에는 안타까운 내용도 숨어있다. 가족의 해체가 그것이다. 핏줄로만 이어졌고 인간적 유대나 배려는 거의 볼 수가 없는 상태로까지 하락해버린 가족들과의 연대는 월트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극명하게 들어난다. 한국 막장 드라마에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소재 중 하나가 핏줄이다. 그런데 서구 영화에선 그것들이 그다지 큰 의미로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사회상의 반영인 것 같은데 지금은 가족이란 의미 없는 핏줄에서 그 누구도 행복을 찾기 힘들다는 것을 이젠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전에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란 영화에서도 비슷한 가족 이야기를 봤었는데 더 이상 핏줄에 기대지 못하고 있는 현대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가족의 문제를 한 번 둘러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이것은 행복을 위해 가족보다 이웃이란 이야기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행복을 줄 수 있는 더 많은 가치가 있다라고 해석된다. 이런 답변에도 가족의 변화는 솔직히 씁쓸하다.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종간의 함께 살기와 가족의 변화와 같은 환경과 관계의 변화는 앞으로의 한국에게도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아니 지금 우린 고집스런 Mr. 왈러스키 혹은 월트 할아버지가 거부했지만 결국 함께 할 것을 결심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야 하는 당위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의 마음을 여는 자세와 용서, 그리고 타인을 위한 분노, 그리고 슬프지만 그의 아름다운 희생 등은 한국인에게도 예사롭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인들이 준비해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