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4월 5주

  영화에서의 침묵, 너무 낯설다. 아니 영화는 침묵을 받아들이는데 익숙지 않다. 오감의 사용을 통해 관객의 이해를 이끄는 영화는 문학과는 다르다. 침묵을 유지하는 문자로 구성된 문학에서조차도 침묵은 전제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상상을 전제한다면 문자로 구성된 문학에서도 다양한 소리가 넘치기 때문이다.
  반갑지 않은 침묵이 과연 존재하는 영화들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존재한다. 소리를 포기하는 것은 영화엔 대단한 모험이다. 낯선 방식에 동요될 관객을 생각하면 침묵을 담고 있는 영화는 상품성의 하락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통해 관객들의 오감을 자극하고 또한 영화의 서사구조를 이해시키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상, 소리 없는 영화는 기존의 이미지 재현방식엔 역행한다. 오직 화면에서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 어쩌면 발전된 현대에서 구석기시대로 돌아가는 것으로 평가될지 모른다.
  하지만 침묵으로 이루어진 영화는 예술적 깊이를 지니고 여백의 미를 전달해준다. 그리고 소리가 없는 것을 통해 더욱 큰 울림을 주기도 한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함께 전달되는 강렬한 메시지는 대화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와 비교해서, 결코 관객의 호응을 이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이런 모험적인 영화들은 무척 색다르면서도 즐겁다. 그 대표적인 것이 '모던 타임즈,' ‘달마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가 그들이다.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시대적 대세였던 토키영화에 저항한 무성영화의 마지막 시기를 대표하는 걸작이자, 현재에 이르러서도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졸작이거나 평범하다는 것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가치가 대단한 영화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영화 한 장면 한 장면은 다시 한 번 음미할 만 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상황이지만 음악만은 경쾌하고 즐겁고 흥겹다. 그러나 장면 하나하나는 결코 웃고 넘길 수 없는 진지함과 인간의 가치가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영화는 현대인의 애환과 풍자를 거의 80년 전에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1936년의 작품이라서 2차 대전 이전의 대공황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오늘날의 경제 위기로 힘들어하는 현대인들과 묘하게 중첩된다. 또한 아마도 100년이 넘더라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기막힌 서정성은 뛰어난 코미디 영화이면서도 계속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또한 인간의 행복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술의 발전이 꼭 인간의 환상적인 미래를 담보할 것도 아니라는 점을 역시 분명하게 알 것이다.
  실수투성이의 모습으로 즐거운 장면들을 보여주는 찰리 채플린은 그러나 매우 늙어 보이고 초췌해 보인다. 아마도 그의 후반기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토키영화에 대항하는 무모한 도전에 힘들어 하는 그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가 자신의 애인과 즐거운 사랑을 하는 장면은 유치할 수는 있지만 무척 감동적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뢰와 믿음이 있어 보이고 상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아련하게 담겨 있다. 과연 그런 장면들이 오늘의 영화에서 재현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말이다. 또한 무성영화이면서도 노래하는 장면에서의 채플린은 역시나 최고의 영화배우이자 코미디언임을 과시한다.
  영화에서의 자본주의가 추진한 자동화에 의한 인간의 소외의 형상화는 현대 시점에선 매우 Old 하게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과거의 기술과 작업에서도 결코 다른 시대의 것이라고 보기엔 내용은 너무 현대적이다. 벨트 컨베이어에서 똑 같은 작업만을 하는 장면과 그런 반복 작업을 일상생활에서도 계속 이어가고 마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동화에 의해 파멸되는 인간의 모습을 가장 뛰어나게 형상화했다. 여기에 데모 군중에 우연하게 참가하게 되면서 그가 맞이하게 되는 불운한 운명은 당시의 미국의 비인간적인 노사문제와 편파적인 시대적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다고 자책하는 애인의 아쉬움이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채플린은 결코 인간에 대한 포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힘들어하는 애인에게 결코 포기하지 말자면서 둘이 걷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기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은 감독이자 배우이자 작가였던 찰리 채플린의 마지막 의지이자 소망이고, 인류 모두가 결코 저버리고 싶지 않은 열망일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불교와 관련된 것임을 달마란 소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선문답 같은 이 영화의 제목은 어떤 깊이 있는 질문과 철학적 주제를 담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들을 수 없는 침묵의 바다 속에서의 영화장면들은 다양한 이미지와 아름다운 화면으로 관객들에게 쉽지 않은 고민을 던져줬고, 무엇보다 禪을 영화로 형상화한 환상적이면서도 고요한 이미지는 불교의 진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회화적인 아름다운 장면과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모습들은 고요한 속에서 들리는 강한 외침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과연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익숙지 않은 배용균 감독의 1989년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프로덕션인 배용균(裵鏞均)프로덕션에서 제작, 감독, 촬영, 조명, 편집 등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 진행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어서인지 영화의 통일성과 감각성은 매우 두드러졌다. 또한 그의 노고는, 흥행은 부진했지만, 제42회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영화(Uncertain Regard)’ 부문에 선정된 소식을 전해줬고, 무엇보다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그랑프리인 황금표범상을 받아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중국 선불교의 창시자인 달마를 제목에 담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강한 선불교의 화두를 주요 테마로 삼은 드문 영화다. 영화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장면을 배경으로 깊고 깊은 산중에서 세속의 인간과 연을 맺지 않고 살아가는 노스님, 젊은 수도승, 그리고 어린 동자스님의 세 명으로 이루어진 어느 퇴락한 절을 터전으로 그들의 번뇌와 갈등, 그리고 그에 대한 종교적 승화를 보여준다. 거의 없는 대사를 통해 선불교에서 말하는 침묵의 가치를 들려준다. 비록 서사적 구성이 이 영화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노스님의 건강에 대한 그들의 고민, 그리고 인생에서 맞이하게 될 최후의 장면에서의 어느 순간 느껴지는 인간적 성찰과 승화는 이 영화에선 최고의 압권이다.  

위대한 침묵 


  언어, 그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단점 역시 존재하는, 인간이 만든 최고의 수단이자 제한요소이기도 한 매체이다. 영화 [위대한 침묵]은 세상의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상과 격리된 알프스 산맥 깊은 곳에서, 침묵이란 방식을 채택한, 이색적인 어느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다. 인간의 언어가 신으로 향한 구도를 방해할 수 있다는 특이한 믿음을 갖고 그들은 알프스 산맥에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Le Grande Chartreuse)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수도방식을 시험한다. 즉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필요한 언어를 극도로 자제하면서, 침묵을 통해 신의 구원으로 다가서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통해 관객들은 고요함과 진지함을 느낄 수 있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그들의 감동적인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침묵은 언어와 반대다. 편견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언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표현은 쉽지만 인간의 가장 발전된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고통과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극도의 침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자연의 신비한 변화를 채득하고, 그 신비로움 속에서 신의 은혜를 확인한다. 생명의 탄생과 복됨은 영화에서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리라. 이런 장면을 감독 필립 그로닝은 162분간 색다른 구성과 방식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심오한 깊이를 제공해준다.
  영화에선 두 가지의 상반된 세계를 느끼게 한다. 우선 변함 없는 수도사들의 생활이 그것이다. 그들은 동료와 함께 있든, 혼자만의 시간을 갖든 철저하게 침묵을 통해 수도한다. 비록 성경을 읽는 장면이나, 일년 중 몇 시간이나 일종의 휴가를 얻는 기간 동안 말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리긴 하지만 그들의 삶 태반은 침묵이다. 이런 항구적인 생활의 모습은 그들의 변화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에 반해 변화하는 것은 바로 시간에 따른 계절의 변화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란 계절의 변화는 생명의 새로운 탄생과 변화를 보여주면서 변화 없는 수도사의 생활과 대조를 이룬다. 역시나 수도사의 생활과 반대되는 세속의 장면들이 간간이 보일 때면 변화하는 속세의 모습과도 대조가 될 것이다. 이런 대조 속에서도 수도사들의 생활의 지속성은 확실히 특이한 모습이다.
  이런 그들의 생활 속에서 잠시나마 얻은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Le Grande Chartreuse)의 수도사들이 겨울철의 즐거운 휴식과 여유, 그리고 놀이는 어쩌면 침묵에 의한 수도가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수도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자 행동이기에 그에 따른 고통은 당연히 따라올 수 있으며, 그런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종교인의 숙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영화의 내용만큼 기이한 제작 과정이 숨어 있다. 그로닝 감독이 수도원에서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부탁한지 무려 19년간 기다렸다거나 여타 영화제에서 결코 경쟁부문에 출전해선 안 된다는 규정을 달았다는 것은 매우 색다른 뒷이야기를 제공해줬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62회 베니스영화제, 30회 토론토영화제, 22회 선댄스 영화제 등에 초청됐지만 수상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겸손의 미덕을 지킨 결과다. 그래도 선댄스 영화제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 바바리안 필름 어워드, 저먼 필름 크리틱스 어워드, 저먼 카메라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아마도 그냥 넘어가긴 힘든 작품성을 결국 인정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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