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4월 2주

  공교로운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샘 워싱턴이 출연한 액션 영화는 단순한 볼거리로만 치장된 그런 영화들이 아니다. 화려한 액션 영화들이란 공통점은 있지만 그런 공통점은 액션배우들이라면 다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샘 워싱턴의 작품은 다르다. 감독이 같지도 않았지만 샘 워싱턴이 출연한 영화엔 언제나 두 세계를 공유하는 하나의 존재감을 지닌 캐릭터로 출연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가 출연한 캐릭터들은 항상 정체성의 문제를 겪는다. 정체성의 문제는 언제나 삶의 방황과 고민을 겪게 되며 그리고 선택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의 샘 워싱턴이 선택한 것은 언제나 더불어 사는 인간의 매력이었다. 어쩌면 가장 인간다움이라 할 타인에 대한 배려와 타인과의 공존을 통한 더불어 살기라는 삶의 방정식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현명한 방식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오늘날의 정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증오, 경쟁, 그리고 전쟁 등 타인과의 부담스런 삶의 방식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켰고 또한 인간을 소외시켰다. 그런 삶의 방식 속에서 파멸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것이 기계로 인하든,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적 인간이든, 신에 의해서든 언제나 희생되는 대상이었다. 인간의 파멸이 당연시되는 그런 집단에 대해 샘 워싱턴의 선택은 언제나 저항이었고, 그것은 정의로운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주제의식인,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이 더욱 빛을 발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그의 강한 주제의식이 다른 영화에서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의 선택은 어쩌면 희생을 담보로 한 선택이며, 또한 비현실적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가 지키려 한 세상은 이상향의 사회로 보인다. 더불어 살기 힘들어진, 각박한 사회현실에 압도된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고, 또한 도피하고 싶고, 그리고 살고 싶은 곳이다. 그것이 원시적인 것이든, 아니면 고대 희랍의 왕국의 모습을 보여주든 말이다. 그런 세상은 이제 아마존의 열대림에서나 볼 수 있는 곳들이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과거가 되어 버린 세상으로의 도피, 그것은 현대인이 현재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의미일 것이며, 인간미가 사라진 현대의 도시를 벗어나길 원하며, 그것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왕국이나 야성미를 지닌 원시부족의 공동체로의 갈망을 의미한다. 어쩌면 정말로 버림받은 곳은 인간미 넘치고, 야성미가 넘치고, 공동체적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상향이 아니라 현대의 도시기계문명인지 모른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곳이기에, 행복도 미리 포기된 세상,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졌으면 하는 기대조차 사라져버린 그런 곳, 도시문명은 샘 워싱턴이 출연한 영화에서 가차없이 비난되고, 그리고 저항 받으며, 그리고 부정된다.
  그래서 샘 워싱턴이 출연한 영화는 단순한 액션 영화를 넘어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득 담고 있으며, 성찰과 현대문명이 지향해야 할 미래의 공동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가 저항한 마음은 지금의 시대정신이 되고 있으며, 각박해져만 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새로운 길을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영화는 추천할 만 것들이다.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2009)}, [아바타], 그리고 [타이탄]이 그것들이다.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든 기계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점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다. 창조자인 인간이 기계로부터 공격을 당한다는 설정은 인간의 어리석은 자기파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진지한 고민을 통해 미래를 기획하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잔인한 방법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런 영화의 서사 속에서 자신이 기계인간이 된 줄 모르고 인간의 편에 서서 싸운 어느 기계인간으로 출연한 샘 워싱턴은 과거의 인간이었던 그 감정으로 살고자 한 기계인간이다. 터미네이터 영화 시리즈가 인간과 기계와의 대결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에서 샘 워싱턴이 분한 ‘마커스 라이트’는 인간의 반대편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무력을 겨눠야 했다. 그러나 기계인간이면서도 인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는 인간처럼 사랑했고, 인간의 가치관을 존중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기계인간으로서 갖고 있을 인간에 대한 적개심이나 인간을 파괴해야만 하는 기본 임무를 포기하고 도리어 적군에 가담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동료에게 어쩌면 총을 겨눠야 하는 역설은 그러나 인간의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역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선택한 진정한 사회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반대의 편에 서게 된다. 이런 주제의식은 다른 영화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그것을 어쩌면 가장 먼저 보여준, 샘 워싱턴 식의 영화가 시작되는 영화다. 무엇보다 그가 선택한 인간미에 대한 매력과 공동체주의는 화려한 액션장면을 넘어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아바타 


  인간이지만 인간미를 잃어 버렸고, 반대로 인간이 아니면서도 원초적인 매력을 지닌 외계 행성의 원주민 간의 갈등은 역설적인 구도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고도의 기계문명을 이룩한 인간은 그 기계문명으로 인해 도리어 인간적인 것들을 잃고 탐욕만을 추구하는 생명체가 되고 말았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다른 생명들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오직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맹종하는 탐욕스런 인간형이 이젠 지구를 피폐시킨 것을 넘어 다른 외계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 ‘판도라’까지 이익을 위한 파괴를 위해 진출한다. 이런 구도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인간이 이룬 현대문명이 부정된 영화 [아바타]는 인간미가 사라진 인간이 인간미가 풍부한 다른 세계를 파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기의 이익에 반대가 된다면 무조건 사라져야만 한다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이 영화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문제이며, 이것은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경쟁 위주의 사회를 투영하고 있다. 인간이 그렇게 타락한 것이다.
  낭만적인 사회로서 인간의 이상향을 담고 있는 외계 생명체가 이 영화에선 가치 있는 존재로 나오며, 역시나 그런 존재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다. 인간의 원초적인 야성과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고 있는 가치 있는 생명체를 ‘판도라’ 행성에서의 주류인 ‘Navi’ 족이 갖고 있다.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Navi족들은 지구인들과 오랜 동안 공존하는 지혜를 선택하지만 결국 인간의 탐욕에 의해 위협을 느끼고 그들과 대적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생명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매력이었다.
  이런 갈등 구조 속에서 인간이면서도, 나비(Na’vi)’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통해 Navi 족이 되는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 설리을 샘 워싱톤이 연기한다. 두 세계를 경험하면서 인간들 속에 사라진 원초적 인간미와 공동체 문화에 동화된 그는 인간의 이익보다 Navi 족을 지키는 전사가 된다. 어쩌면 생명체의 속성보다 생명체로서 누릴 수 있는 인간미 넘치는 사회적 매력을 더욱 동경했을 것이며,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없어져가고 있는 인간미에 대한 아쉬운 동경이자, 이상향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화는 먼 외계에서 벌어지는 슬픈 우화를 3D라는 진보된 기술을 통해 형상화한 역시나 역설적인 영화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영화나 기술로만 가능한 현실을 보여줬는지 모르겠다. 
 

타이탄 

 

  고대 희랍에서의 신과 인간이 공존했던 신화를 배경으로 신과 인간의 대결을 보여준다. 이런 구도는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이상향,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인 그곳에서 현실과 유사한 힘겨운 갈등이 존재한다. 신화나 현실이나 결코 편하지 않은 세계관, 이 영화엔 그런 것이 존재한다. 현대인들이 꿈꾸는 그곳에서조차 불편한 인간관계와 힘든 여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불행이 모든 영역으로 전염된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도 사실주의 작품에서처럼 괴로운 현실은 곧 괴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구성은 결코 보여주지 않았다. 좀 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고 할까? 속편을 염두에 둔 마지막을 보면 미국 영화의 상업주의가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은 어떤 영화나 갖고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런 면으로 폄하할 수 있는 그런 영화는 아닌 것 같았다.
  타이탄이란 영화의 갈등은 인간을 창조한 신과 스스로의 능력을 자각하고 독립하고자 한 인간과의 갈등이다. 창조했기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신, 제우스와 스스로의 자립을 추구하는 인간, 마치 중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신학에 대한 근대 이성의 도전처럼 보였다. 어쩌면 창조했기에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진부한 소유관념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결코 아버지가 요구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신은 그것을 요구했으며, 여기에 갈등의 씨앗이 등장하는 것이다.
  ‘Demi God,’ 사실 낯선 호칭은 아니다. 어떤 영화에서 이미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반신반인의 존재인데 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인간이기에 느낀 가족애와 사랑,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샘 워싱턴이 분한 ‘페르세우스’는 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위한 자리를 포기하고 인간을 지키기 위한 전사가 된다. 탄생시킨 아버지보다 키워준 어부의 아들이기를 자처한 ‘페르세우스’는 공포의 대명사인 지옥의 신 ‘하데스’와 대적한다. 그 충돌 속에 다양한 희랍 신화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조되어 등장하는데 인간을 위해 싸우는 액션은 전작인 3D 작품인 [아바타]의 액션을 다시 한 번 즐기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어느 고독한 인간의 치열한 여정을 볼 수 있어 3D 영화로서만 평가해선 안될 또 다른 매력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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