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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타샤 튜더 (양장)
타샤 튜더 지음, 리처드 W. 브라운 사진, 공경희 옮김 / 윌북 / 2026년 3월
평점 :
읽어야 할 책은 여전히 책상 옆에 쌓여 있고, 새로 도착한 책도 있다. 평소 같으면 망설임 없이 다음 책을 집어 들었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책을 덮은 채,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언가가 아직 끝나지 않은 느낌이었다.
'The Private World of Tasha Tudor'는 정갈하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설득하려 들지도 않는다. 대신 그냥 한 사람의 시간을 보여준다. 꽃을 가꾸고, 빵을 굽고, 아이를 돌보고, 고양이와 함께 지내고, 사계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삶. 겉으로 보면 아름다운 전원생활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노동과 고집, 반복과 선택이 얽혀 있다.
책 속 사진들을 넘기다 보면, 이상하게도 예쁘다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물론 아름답다. 꽃밭은 빛나고, 식탁은 따뜻하고, 아이는 사랑스럽다. 그런데 그 장면들 뒤에 있는 시간의 무게가 먼저 느껴진다. 저 풍경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이 있었을까. 눈을 치우고, 장작을 패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다시 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시간들.
그 시간을 견디지 않으면 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진들은 낭만적이면서도 묵직하다.
골동품 식기를 여전히 쓴다는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상자에 넣어두면 깨지지 않겠지만, 그러면 쓰다가 깨질 일도 없지 않겠느냐는 말. 처음에는 그저 소박한 취향 고백처럼 읽혔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니 그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아껴둔다는 이유로 쓰지 않고 있는가.
시간도, 마음도, 능력도, 관계도.
깨질까 봐, 상할까 봐, 소모될까 봐 미루고 있는 것들이 떠올랐다.
타샤의 삶은 철저히 선택의 결과다. 유행을 따르지 않고, 편리함을 좇지 않고, 속도를 올리지 않는다. 대신 자기 세계의 리듬을 지킨다. 그 리듬은 느리지만 게으르지 않다. 단순하지만 단출하지 않다. 오히려 굉장히 치열하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을 받아들이고 그 반복 속에서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태도.
나는 그 태도가 부럽다.
요즘의 나는 효율을 계산하고, 성과를 따지고, 다음 단계를 고민하느라 현재를 충분히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책을 읽으면서도 이 문장을 어디에 인용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계산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냥 읽고, 그냥 보고, 그냥 느끼게 했다. 마치 그의 집에 초대받아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꽃밭에서 아이와 함께 데이지를 따는 장면을 보며, 나는 문득 저 아이는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꽃 이름보다 먼저,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계절이 돌아오는 속도를 몸으로 아는 법, 오늘 심은 씨앗이 당장 열매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
그런 배움은 교과서에 없다. 대신 삶 전체가 교과서가 된다.
내 방을 다시 둘러보았다. 전등 불빛, 책상 위 머그컵, 펼쳐진 노트, 미처 정리하지 못한 메모들. 나는 이 공간을 얼마나 책임지고 살고 있는가. 이 방은 나의 세계인가, 아니면 잠시 머무는 중간지대인가. 타샤의 집은 분명 그녀의 세계였다. 취향이 쌓이고, 시간이 스며들고, 선택이 축적된 결과물.
나는 아직 내 세계를 그렇게까지 밀도 있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운을 조금 더 붙들고 싶었다.
'The Private World of Tasha Tudor'는 거창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무엇을 아끼느라 쓰지 않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나의 하루는 누구의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나의 세계를 얼마나 끝까지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잠시 내 삶을 펼쳐보고 싶었고,
지금 쓰지 않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 써보고 싶었다.
그리고 깨질 수도 있겠지만, 써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