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결정의 순간들 - 자동차, 아파트, 재벌, 도시에 관한 가장 현대적인 이야기
정몽규 지음 / 쌤앤파커스 / 2026년 3월
평점 :
“도시를 짓는다는 건, 결국 자기 이름을 걸고 시간을 견디는 일이라는 고백.”
'결정의 순간들'이 나에게 남긴 건 재벌 회장의 자서전 같은 거대한 이미지가 아니다. 책임을 혼자 떠안아야 하는 한 인간의 체온이었다.
자동차, 아파트, 재벌, 도시, 노사 갈등, 중동 건설 붐, 해운대의 스카이라인까지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훑는다. 표면적으로는 기업 경영의 기록이고 산업화 이후 한국 도시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결정은 누구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만이 책임을 진다라는 문장을 여러 변주로 반복하는, 일종의 책임론 에세이에 가깝다.
직관에 대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바둑 고수의 수읽기처럼, 수많은 경험이 패턴으로 축적되어 직감처럼 튀어나온다는 이야기. 데이터와 감(感)을 대립시키기보다, 감을 압축된 데이터로 이해하는 태도는 의외로 설득력이 있었다. 경영을 신화적 영감의 영역이 아니라, 패턴을 읽고 타이밍을 포착하는 훈련의 산물로 보는 시선은 현실적이다. 이 대목이 이 책의 사고방식을 가장 잘 드러낸다. 영웅 서사가 아니라, 반복과 축적의 논리.
또 하나 남는 건 완벽에 대한 태도다. 완벽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추구할 가치라는 말, 그리고 결국은 타협하고 손을 떼야 한다는 인정. 도시와 건물을 만드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은 울림이 있다. 스카이라인은 영원할 것처럼 서 있지만, 그 결정의 순간은 늘 불완전한 정보와 리스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고백이니까.
해운대 아이파크 이야기도 그렇다. 분양 시장이 얼어붙은 시기, 최고가 아파트를 밀어붙인 선택. 지금의 결과만 보면 대담한 승부수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을 감이 좋았다는 식으로 신화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지 매입부터 분양까지 전 과정을 책임졌다는 내용에서, 이익의 논리와 도시 가치 창출이라는 명분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드러난다. 냉정하게 말하면 기업의 시선에서 쓰인 이야기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한국 도시가 어떻게 상품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도 들어 있다.
노사 갈등, 재벌에 대한 사회적 시선, 성공한 오너가 경계해야 할 오만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성공은 실력보다 타이밍인 경우가 많고, 먼저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 세 번째, 네 번째 주자가 결실을 가져가기도 한다는 고백은 의외로 솔직하다. 그 솔직함 덕분에 이 책은 일방적인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불안과 의심, 고독을 동반한 의사결정의 연대기로 읽힌다.
결국 시간에 대한 책이다. 오해는 남지만, 시간은 증인이 된다는 문장. AI가 방대한 정보를 요약해주는 시대에도,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 모든 것이 속도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 이 책은 버티는 시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도시도, 기업도, 명성도 결국 시간 위에 쌓인다는 믿음.
물론 아쉬움도 있다. 재벌 체제의 구조적 문제나 도시 개발의 그림자에 대한 성찰은 상대적으로 얇다. 개발의 승리 서사 뒤에 밀려난 사람들, 공간의 상품화가 남긴 균열까지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내부자의 증언에 가깝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자료적 가치이기도 하다. 한국의 한 대기업 경영자가 자기 언어로 풀어낸 결정의 철학은, 동의하든 비판하든 읽어볼 만하다.
도시를 만든다는 건 한 시대의 욕망과 두려움을 구조물로 고정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고정의 순간마다 누군가는 이름을 걸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처음엔 경영 이야기로 보였지만, 책임과 시간에 대한 에세이로 남았다. 화려한 스카이라인보다, 그 뒤에서 고민했을 한 사람의 망설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