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전 읽기 - 이 시대 대표 지성인 10인이 말하는 나의 인생과 고전
공지영 외 지음 / 북섬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까마득한 시절의 고리타분한 얘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외모에서부터 지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인간적인 심성조차 드높고 빼어나 모두들 선망하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배가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늘 문고본 책 두 권을 들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곁눈질로 표지를 넘겨다보니 박현채 님의 <민중과 경제>와 한완상 님의 <민중과 사회>였습니다. 그 즈음 시리즈 물로 간행된 듯 하더군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대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이기에 선배가 저렇게 애지중지할까 궁금했습니다. 하여 어느 날 용기를 냈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선배에게 부탁하여 그 책을 빌린 것입니다. 얇고 작은 부피와는 다르게 담겨 있는 내용은 만만찮았습니다. 고 1,2때부터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니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 비교적 범접하기 어려운 책을 비록 겉 핥기 정도이기는 하지만 접해본 바가 있어 웬만한 책에 대해서는 진입장벽을 느끼지 않던 나였지만 우리나라 학자가 우리말로 펴낸 평범해 보이는 책인데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민중과 경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도무지 읽혀지지 않았습니다.

왜일까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시간이 꽤 흐른 되에야 그것은 문체나 내용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그간 배워왔던 경제 지식과는 지향점이나 지적 배경, 이론적 전제 등이 근본적으로 다른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마르크스 계통의 정치경제학 입문서였던 것입니다. 하니 주류 경제학의 세례를 듬뿍 받아 그 세계에 길들여져 있던 나의 논리 구조로 순순히 들어올 리 없었던 것이지요. 하여 이번에는 기존의 사고틀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리하여 가치 판단이나 나름의 분별력도 발휘하지 않고 그냥 오롯이 받아들이리라 마음먹고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읽혀졌습니다. 더구나 의미가 절로 환해지며 머리에 쏙쏙 들어오기까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때서야 주류 경제학의 그것과는 차원이 아예 다른 정치한 이론 틀에다가 따스한 인간미까지 배어있는 것이 빤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단번에 빨려들게 되었지요. 그 후부터 <전후 30년의 세계 경제 사조>, 증보판 <민중과 경제> 등 박현채 님이 펼쳐둔 드넓은 세계로 서슴없이 나아가 그를 사숙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강단 사회주의자에도 못 미치는 얼치기에 불과하지만 고등학교 때의 그 충격과 감동의 여운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경제학이 인간 해방을 위한 따스한 학문이 되어야함을 마음 판에 깊이 새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는 않지만 그러한 것들을 가슴으로 나눠주고 손발로 실천하려 늘 다잡고 있기도 합니다.

나는 고전이 박현채 님의 <민중과 경제>와 같은 부류의 책이라고 여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와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하고 그 이후 삶의 방향을 선회하도록 만든 마력을 지니고 있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

그런데 김두식 님에게 다가온 그것은 <톨스토이 민화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엔나 소년 합창단 공연 팸플릿에 나와있는 제일 무서운 것이 전쟁이라는 아이들 의견을 보고 의아해하며 TV드라마 '전우'에 열광하던 유신 체제 시절 그의 삶 속으로 삼중당 문고가 들어온 것입니다. 악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선한 세력이 더 큰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선의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에 사로잡혀있던 그에게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이상주의적 신념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너무 늦지 않게'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발언을 시작하고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합니다. 그러면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도 인간의 불완전성에 비추어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영역임을 인정하여,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던 톨스토이 사상마저 발전적으로 극복해나간 과정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기승전결 리듬을 타며 실감나게 풀어나가고 있는 김두식을 따라 읽다보니 어느새 그의 내면과 교감하며 동조하게되었습니다. 그의 정신세계의 일단을 또렷이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고전 읽기의 생생한 경험이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나의 고전 읽기>에는 김두식에 못지 않게 고전과의 극적인 만남을 경험했던 이들이 들려주는 애틋하고 심원한 이야기들로 빼곡합니다. 따라서 <나의 고전 읽기>는 '의미 있는 책과의 실존적 조우'라는 행복한 경험을 거의 누려보지 못하고 있는 요즘 세대의 지적 풍토에 신선한, 어쩌면 뼈저린 자극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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