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발견 -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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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없는 소리가 없어서 귀가 즐겁다. 귀가 즐거우니 눈도 즐겁고, 덩달아 입도 마음도 즐겁다. ‘여기’있는 소리가 ‘거기’라고 왜 없겠는가. 귀를 막고 싶은 일들이 많을수록 즐거운 소리를 찾아서 듣는, 또 다른 귀를 열어보자.(122)

 

참 유별납니다. 도무지 보이고 들리지 않는데 무얼 또 찾아서 들어보라는 겁니까. 그리고 즐거운 얘기라뇨? 실은 올 봄 들어 모래 씹은 듯 입안도 까끌까끌하고 마음도 스산한 게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답니다. 앞날을 생각하면 온통 잿빛 일색인데 즐거운 얘기 떠올릴 겨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넋 놓고 세상 물결에 그냥 휩쓸려 다니는 마당에 참 한가한 소리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솔직히 반감이 일었답니다.

 

그런데 정말 내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은 보여주었습니다. ‘기별’과 ‘대밭’을 읽다가 아!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어요. 나무가 낙엽 한 잎 떨구는 것에서도 내밀하고 변화무쌍한 상황과 장면과 과정을 포착하여 눈에 빤히 보이게 그려내었고 대밭에 깃들어 사는 뭇 생명들의 연쇄까지 쭉 꿰어서 읽어내었으니까요. 정말 발견이란 말을 써도 될 듯했습니다.

 

그래요. 또 시인은 내 얼굴에 겹친 주름 몇 가닥을 당겨주었습니다. 아이들 웃음과 따뜻한 집 밥과 다정한 이웃어른의 잔기침 같은 게 잔뜩 묻어 있는 얘기를 읽다가 입 꼬리가 슬몃 움직이는 게 느껴졌거든요. 최근엔 경험하지 못했던 색다른 기분이었달까요. 시인은 배꼽 잡게 만드는 얘기와 맛깔스런 음식, 거기다 절창인 시까지 곁들여 삼락(三樂), 아니 그보다 더한 다락(多樂)의 기쁨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아차! 그래서 그만 너무 빨리 읽어버렸네요. 처음 지녔던 약간의 반감은 감쪽 같이 사라지고 어느새 빨려들고 말다니. 미안해요. 담긴 의미로 치면 하루 한 편씩 곱씹기도 벅찬데 재미에만 홀려 덜컥 다 읽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이를테면 우리를 이루고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한 대목 같은 건 종일토록 음미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돈데 말입니다.

 

혼자 잘나서 출세하고 이름을 얻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이걸 착각하거나 망각하면 오만해진다. 겉은 멀쩡한데 영혼이 죽은 사람이 된다. ‘너’가 없으면 ‘나’는 없다. ‘나’는 ‘너’로 인해서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나는 너다.(385)

 

시인은 무얼 보고 이런 깨우침을 얻었을까요? 인간 세계의 이치를 생각해서 떠올린 게 아닙니다. 나무를 바라보다 절로 알아낸 것입니다. 자아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복합적 망이 겹쳐 보였던 것입니다.

 

나무가 나무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을 다 갖추었다고 치자. 그런데 만약에, 어느 특정한 나무에 세 들어 사는 벌레와 이끼가 그 나무에 없다면 그 나무를 온전하게 나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나뭇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이 기이하게 어느 한 나무에만 닿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리가 나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무는 자기 혼자서는 어느 한순간도 나무가 될 수 없다. 자기 힘으로는 어떤 공간에서도 나무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명해진다. 나무에 날아드는 새도 나무라는 것을. 나무 그늘에서 부채를 부치며 쉬는 할머니도 나무라는 것을. 어느 나무의 배경이 되고 있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풍경도 사실은 다 나무라는 것을.(384-385)

 

[안도현의 발견]엔 유독 나무에 빗대 세상 이치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읽으면서 자연스레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세상에 순치되지 못하고 아직도 가시를 곧추세우고 있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했던 ‘음나무’에선 아픈 생채기가 덧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자라나 줄기가 굵어지고 잎사귀가 허공 높은 곳까지 이르게 되어 생의 정착 단계가 되면 서슬 퍼렀던 가시가 퇴화되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가 된다면서,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사람도 가시를 세우는 것일까? 나이를 먹어도 가시를 거둬들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럼 뭐지?"(381) 라고 말할 땐 뒷통수가 저릿해졌답니다.

 

시인의 발견을 경탄의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감정이입의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답니다. 딱 내 얘기다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거든요. ‘도끼’에선 문약한 자신을 탓하는 시인의 모습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나 내 도끼는 나무의 중심을 맞히지 못했다. 두 번 세 번 거듭해도 마찬가지였다. 장작을 패는 일은 번번이 빗나가는 사랑하는 일과 같아서, 정답을 피해가는 답안지와 같아서......독기 없는 도끼는 나처럼 비틀거렸다. 내 가는 손복으로, 이 흰 손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27)

 

시인의 얘기엔 때론 쓰달픈 세상사가 어려 있기도 합니다. 문정 시인에 대해 착하게 살지 말라고 권하는 대목에선 가슴 속에 싸한 바람이 일었답니다. 시인의 속앓이가 오롯이 전달되는 것 같았거든요.

 

“친구여, 다음 생에는 부디 착한 남편, 착한 선생, 착한 시인으로 오지 마시게. 큰소리 뻥뻥 치고 거들먹거리고 다리라도 건들건들 흔드는 불량한 건달로 오시게.”(290)

 

이렇게 웃픈 이야기, 곱씹을 얘기가 널려 있어 마치 향연에 취한 기분입니다. 남도 한정식을 거하게 한 상 받은 느낌이랄까요. 반찬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때깔 좋고 깊은 향도 배어 있으며 베어 물고 한참을 씹어도 뒤끝이 깔끔한 것 말입니다. 이런 얘기들을 어디서 다 끌어올렸는지.

 

그래서 시인의 발견, 맞아요! 발견이라 해야 하겠네요. 누가 이런 것을 알아보고 찾아내고 살려내어 우리 앞에 떡 펼쳐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시인의 각별한 눈, 따스한 눈, 그러면서 연민의 물기 촉촉하게 어려있는 시선이 있었기에 길어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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