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 권대웅 시인의 달 여행
권대웅 지음 / 예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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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모든 감각 세포는 아름다움을 향해 열려있다. 때론 눈물겨워 쩔쩔매다가 더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지러지기도 한다. 중국 계림의 이강을 따라 배를 타고 양숴로 가는 도중 주변에 펼쳐지는 선경에 취해선 비를 흠뻑 맞으며 끊었던 담배까지 다시 꺼내 물 정도였다. 그런 시인을 빼닮은 글과 그림은 하나 같이 아름다움의 어떤 지점에 닿아 있다. 웅숭깊은 글에 곁들인 아련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 또한 무장 해제되어 다만 고분고분 그의 마음결을 따라갈 밖에. 시인의 시는 그림과 어우러져야 오롯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왼쪽 장에 인쇄된 글귀로 시가 소개되고 맞은편엔 달 그림 밑에 손글씨로 씌어진 시가 나오는 경우, 시만 읽어선 도무지 맛이 나지 않는다. 그림이 없어서일까? 아니, 그보단 매끄러운 인쇄체가 너무 빨리 읽혀서이다. 도무지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화 속 글귀는 그림 밑에 꼬불꼬불 기어가고 있다. 그런데 지렁이체로 끼적거린 그 글에서 묘하게 온도가 느껴지고 정감이 꿈틀대는 듯하다. 알아먹기 힘든 글씨를 간신히 읽어내고 나면 아! 뭉클 탄식이 솟구친다. 달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 같다.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밀려나온다.

 

시인이 눈여겨보고 있는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여리디 여리기만 하다. 그런데도 힘이 있다. 우리네 흐트러지고 상한 마음을 푸근히 감싸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대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자연이다. 그 속에서 시인은 그것들과 교감하며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치마를 펄렁이며 보랏빛 속살을 보여주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들, 그 속살에서 풍겨오는 연하디 연한 향기 같은 것들. 그동안의 아집과 망집과 뒤틀린 두통 같은 것들을 어루만지고 치유해주는 부드러운 손길 같은 것들...(139)

 

그런데 시인은 자연을 인간과 동떨어진 별개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인간의 비극과 상관없는 듯 초연하기만 한 자연계의 질서를 보고선 경악한다. 그럴 수는 없다고 말이다.

 

부서진 집들 사이 목련나무 한 그루에서 하얀 목련이 가득 피어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아휴! 징그러워.”

인간은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그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파란 하늘, 하얀 목련꽃들은 부조리다. 그래서 징글맞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196)

 

그래서 시인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여운 인간으로 옮겨진다. 시인의 눈에 비친 나약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의 모습은 눈물겹게 아름다운 것이었으니.

 

골목길이 아름다운 것은 동네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밥 짓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가족이 둘러 모여 저녁 먹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만나면 인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나가기 때문이다.(161)

 

시인은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건네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걷다가 추위와 허기에 지친 상태에서 마침 무료급식소를 발견했는데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시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는 이가 있었다. 남루한 행색의 노인이 “한 그릇 먹고 가!” 하며 시인을 불렀던 것이다. 그 말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게 또 있으랴.

 

밥이라는 말만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배고파봤던 사람에게 배가 고픈 사람에게 밥은 꽃보다 아름답다. 사연이 있는 밥을 먹어본 사람은, 밥을 먹으며 목이 메어 울어본 적 있는 사람은 밥의 위대함. 밥알 한 알 한 알의 숭고함을 안다. “밥 먹고 가~” 이 말이 주는 울림, 끌어안음, 쓰다듬음, 배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 어렸을 적 어떻게든 밥 챙겨 먹이려는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그 사람은 따뜻한 사람이다.(144)

 

시인은 얼핏 스치는 향기에서도 아름다움의 한 경지를 느낀다. 라벤더의 좋은 향은 두통을 멈추게 하고 불면증을 없애고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기도 하는데 그런 향기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존재의 까마득한 기억을 열어주는 열쇠 중 하나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시인은 또 아름다운 색깔이 우리를 위무하고 치유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동안 나의 상처는 온전히 보라가 되지 못했다. 내 안에 머금지도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아물지 않은 생채기로 수두룩하게 남은 그 상처를 도리어 남에게 뱉어내기만 했다. 눈이 돌아가고 입이 삐뚤어져서 툴툴거리기만 했다. 내 안에 와서 어떤 색깔로도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떠돌던 상처들...깊이 농익어 오히려 투명해진 연보라의 물결과 향기에 내 영혼과 상처들을 씻고 싶었다.(138)

 

시인이 벌여놓은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는 돌고돌아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둥글고 환한 달, 그리운 것이 모두 들어있는 달로 향하고 있다. 거칠고 버겁기만 한 세상에 상처받고 자신의 모나고 뒤틀어지고 용렬한 모습에 또 질려버린 이들에게 갈망하고 열망하고 갈구하며 간절하게 바라보라고 권한다. 달에게서 힘을 얻으라고, 아름다움을 위안 삼아 어떻게든 버텨내라고 다독거린다. 시인도 어려운 시기에 그쪽을 향해 달리다가 달 그림으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달, 간절히 원하는 것, 그쪽으로 달려가며 달에게 빌었다. 그 좋은 파동이 왔다. 에너지가 왔다. 그리고 달을 그리게 되었다. 그림을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294)

 

그래서 시인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아름다운 달을 놓치지 말라고 강권한다. 과거에 얽매어 있으면서 미래를 걱정하기만 하는 우리에게 아름다움에 눈뜨라고 말이다.

 

우리는 역방향으로 앉아 가는 기차 승객처럼 앞은 보지 못하고 뒤만 보고 산다. 그러면서도 매 순간 앞만 생각하기 때문에 광활하고 아름답고 여유롭게 뒤로 펼쳐지는 겨를을 두지 못하는 것이다.(223)

 

시인이 풀어내는 이야기와 아련한 그림을 듣고 볼수록 묘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시인이 바로 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아름다움에 겨워하며 우리까지 그 대열로 넌지시 이끌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의 집시이자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어린이였으며 춥고 고달픈 내게 손을 내미는 친구이기도 했으니. 무엇보다 지혜로운 깨우침을 전해주는 현자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시인이 그린 달의 모습과 겹쳐 보일 밖에. 하여 달 시인의 달 그림을 바라보며 한동안 세상 시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시름을 덜어내고 환하고 둥근 곳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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