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다. 어쩜 사적 고백
같이 두런두런 들려주는 필자들의 사랑 얘기가 이렇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올 줄이야. 이미 유명세를 탄 소설에 대한 방담 형식의 글이어서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빨려들어 저릿저릿해질 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준비 없이 황홀경을 맛본 기분이랄까?
울렁거리게 만든 연유 몇 가지를 짚어보면,
1. 입글이 이 정도일 줄이야
애초부터 글로 씌어진
문장과 구술된 텍스트를 정리한 입글은 여러 측면에서 구별이 된다. 수용하는 대상이 다름은 물론, 발화자에게 요구되는 컨텐츠의 성격과 수준도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대개 후자가 거칠고 성글어 덜 정제된 것이기 십상이다. 자연스레 오간 대화 내용이 작심하고 치밀하게 구성한 논리적 문장에
폭이나 깊이가 못 미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이동진과 김중혁이 진행한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 방송 내용을 녹취
정리한 것이다. 방송 중에 진행자, 더블 캐스터 간 나눈 대담을 약간 손 본 것이니 설렁설렁 즐기듯 읽어도 되지 않을까 지레짐작했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예단이 크게 빗나갔다 해야겠다.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물론 청취자들이 클릭하도록 이끌어야 하는 방송매체의 특성과 순발력과
즉흥성이 가미될 수밖에 없는 입글의 성격 상 약간의 선정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글로 씌어진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세련되고 정선된 논리와
문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라 할까? 입글 특유의 활기와 생동감으로 친근하게 다가오면서 질 높은 담론으로 의식을
고양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두런두런 늘어놓는 얘기를 듣다 어느새 진리의 한 문턱을 넘은 듯도 하다.
2. 호흡이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진행자, 필자가 둘이라는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자칫 일을 그르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산만하게 겉도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둘의 궁합이 척척 잘도 어울려
보기 좋았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환상의 조합이었달까. 꺼꾸리와 장다리처럼 둘은 다른 캐릭터를 지니고 있지만 케미가 장난 아니었다.
상호보완적으로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던 것이다. 둘의 역할 분담은 이야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지게 한다. 김중혁은 소설 내적 분석에 초점을
맞춰 얘기를 풀어나가는데 글쓰기 전략이나 작가적 감성, 삶과 창작물의 관계 등에서 내공을 십분 발휘한다.
저는 그것이 단 3일
동안의 일이고 주인공에게는 급박한 어떤 순간들이기 때문에 그런 문체를 선택했고 그것이 전략적으로 아주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어요.(177쪽)
직접 소설을 써 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심경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김중혁은 또 작품을 읽다 울컥했단 이야기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폼 잡기 좋아하는
작가들이 금기시하는 일인데도 거침이 없다.
로비가 경찰에 체포되는
장면은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그때 브리오니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거든요.(32쪽)
이동진의 담론은 김중혁의
그것과 결이 약간 다르다. 좀 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차분한 톤으로 발언한다. 다양한 배경지식에다 미학적 안목을 곁들여 작품을 분석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풀어내어 독자를 빨아들인다. 때론 삶의 지혜가 듬뿍 배어 있는 혜안도 내비쳐 아득하게 만들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스피노자의 말이 있어요.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는 말인데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런 거죠. “나는 네가 짜증만 자주 부리지 않는다면 너를
정말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사랑을 한정하지 않아야 부정하지 않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믿음의
속성이 그래요. 우리가 어떤 종교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부분만 없다면 그 종교를 믿을 거라고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거죠.(230-231)
둘이 선호하는 작품과
좋아하는 대목도 달라서 얘기가 한층 다양하게 전개된다. 하루키 작품만 해도 이동진은 장편인 [태엽 감는 새]를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반면,
김중혁은 [땅속 그녀의 작은 개] 같이 아릿한 단편을 더 높이 사고 있다. 다자키 쓰쿠루 얘기를 하면서 기차역의 이미지에 대해 김중혁은
못마땅하다고 여기는데 반해 이동진은 그 대목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선호와 해석이 다른 것은 이동진이 논리적인 구조를
중시하는 반면 직접 소설을 쓰는 입장인 김중혁은 스타일과 감성에 더 굵은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더욱 풍성하게 여러 층위로
뻗어나간다.
3. 이런 깊이까지 건드릴 줄이야
평론가와 작가의 대담이니
기본적으로 담론의 수준이 보장된다 하겠지만 그들이 다루는 이야기의 범위와 질은 상상 이상이었다. 몇 번이나 저릿했다 할까. 캐릭터, 페르소나 및
에고 같은 주인공의 성격 분석은 물론 작품의 미학적 측면에 대한 정교한 해석까지 그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소설 구조를 분석하며
플롯의 정교함에 경탄하는 필자들을 얘기를 들다 덩달아 울렁거리기도 했다.
결국 상상력의 죄를
상상력의 힘으로 속죄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해보면 정말 재미있어요. 특히 뒤의 상상력은 소설 짓기와 관련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속죄]는 메타
소설의 측면도 가지고 있구요. 참 대단한 것은요, 1부에서는 장황하게 보일 정도로 길게 이야기하다가 2부는 박진감 넘치고 3부는 또 매우
애절해요. 그러다가 에필로그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이 소설의 주제를 보여주죠. 아주 무겁게요. 정말 마지막 두 페이지의 무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잖아요. 여기에서 저는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묵직한 책임감을 새삼 느꼈습니다. (53쪽)
이렇게 다소 복잡하게
인물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캐릭터의 작법도 소설의 핵심과 닿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 소설에서 쓰쿠루가 역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요?
소설의 마지막 챕터에서 일부러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다고 할 만한 신주쿠 역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도 그게 사실 쓰쿠루이자 쓰쿠루의 확장된
자아로서의 세계이기 때문일 테니까요.(318)
한 수 단단히 배운
기분이다. 어쩜 계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고 스토리만 즐기던 애송이 독자가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틀과 방법론을
초보적이나마 맛보고 느꼈으니 말이다. 작가들의 얘기를 듣고 내용을 따라가다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행간의 숨은 의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4. 경탄뿐 아니라 부족한 부분까지 짚어 내다니
다들 [그리스인
조르바], [다자키 쓰쿠루]하면 껌뻑 넘어가곤 한다. 작가들도 마찬가지로 애정 고백을 진하게 하고 있다. 한편 사랑이 깊으면 안타까움도 큰 법,
그들은 사랑하는 작가들의 빼어난 작품에서 아쉬운 대목을 짚고 있다. 조르바의 마초적 특성과 주인공의 문약한 면모를 지나치게 대비한 점이 오히려
작위적인 감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든지, 다자키 쓰쿠루가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음에도 내러티브를 들려주며 다시 한 번 내용을 상기시키는 방식이
너무 지루한 것 아니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마무리된 이야기에 굳이 첨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앞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1인칭 시점이었다면 그런 감정적인 부분을
극대화해도 독자로서 동화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주인공에게 작가가 계속 이야기를 하는 느낌인
거죠.(324-325)
하루키에게 애증이 짙게
교차되는지 다자키 쓰쿠루의 음악적 취향과 화법에 대해서도 딴지를 건다. 그런데 하나 같이 딱 맞는 얘기다.
또 다자키 쓰쿠루는
특별히 클래식에 조예가 깊거나 지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데 처음 프란츠 리스트 음악을 듣고는 그 음악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요. 사실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악장 같은 개념을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정확하게
설명하죠.(298)
하루키를 읽을 때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필자들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인정할 밖에. 정말 꼼꼼하게 읽었구나, 작가와 작품을 이렇게나 깊이
사랑하는구나 하고 절감했다.
5. 놀라움이 다짐으로
놀라운 경험은 마음을
움직이는 법. 김중혁과 이동진의 얘기를 들으며 그동안 놓친 게 너무 많구나 하는 자탄이 밀려왔다. 필자들이 든 작품 대부분은 이미 읽어보았고
내용도 빤히 알고 있다 자부했는데 그만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문득 읽기나 했나 싶기도 했다. 그런 얘기도 있었구나, 그 대목은 복선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맘마미아! 작자가 이런 상징을 행간에 배치해 두었구나 경탄하기도 했고. 작품의 결이 전과는 완전 다르게
읽혔다. 좀 과장하자면 한 꺼풀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걷히며 신세계가 환히 열린 듯했다. 그래서 다시 그 책들을 잡아야 겠다고 마음결이
울렁거렸다. 특히 [속죄]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곱씹고 곱씹으며 정독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필자가 사랑한 소설들이 앞으로 내가 더욱
사랑하게 될 작품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