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반양장)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교과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유령이 경제학계를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은 좀처럼 퇴치할 수 없다. 유령을 떠받드는 이들이 언제나 학계를 좌지우지해왔기 때문이다. 유령 숭배하는 자 특유의 배타적인 도그마에 빠져 안하무인으로 전권을 휘둘러온 것이다. 그 도그마는 경제학이 가치 판단을 배제한 명료하고 논리적인 과학이며 숭배자들만이 본령에 접근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또 시장 기능은 완벽하며 국제거래는 으레 자유무역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이를 확신하며 도그마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이렇게 공고화된 경제학계의 지적 전통에 딴지를 거는 이는 그간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제학은 그렇게 대중과 유리된 채 그들만의 리그로 굴러갈 따름이었다.

 

우상 숭배와도 같은 이런 맹신을 경계하고 지적하며 대안을 제시하기란 예사 각오로는 어림도 없다 하겠다. 학계에서 매장당할 게 빤히 보이는 짓이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 좌충우돌하는 이단아가 있다. [사다리 걷어차기]를 필두로 주류 경제학계의 아성에 도전하는 행보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장하준 교수가 바로 그다. 기성학계의 거센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오늘도 고스트 버스터를 자처하고 있다. 이번에 장하준 교수의 포커스는 대중에게 맞춰져 있다. 난해한 암호 같은 경제학이 아닌 일반인의 지적 수준으로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경제학을 지향한다. 이를 통해 그는 대중이 도그마에서 벗어나 이성을 회복하게끔 이끈다. 어느 정도 지적인 수준을 갖춰야 하는지 정의적으로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지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한마디로 대중들이 학계를 배회하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도그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녀야 할 지적 정의적 매뉴얼이라 하겠다. 여기서 장하준이 꼽고 있는 경제학계의 도그마 몇 가지를 짚어보자.

 

1. 가치 판단을 배제한 순수과학이라는 도그마

 

학자들, 특히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을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가치가 배제된 순수 학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어떤 정치적 의도나 윤리적 정당성과도 무관하게 냉정한 과학적 법칙이 작용하는 대상을 수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 맹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이는 정치인이요, 그는 특정 이념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경제 영역에 외부 요소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며 사회적 약자가 배제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논의가 무성하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편적 복지, 부자 증세 논쟁 등은 다분히 가치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다루고 있는 재정 및 금융 정책도 이런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처럼 현실과 유리된 순수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을 우상처럼 신봉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장하준은 통렬하게 질타하고 있다. 인용하고 있는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의 발언은 그래서 울림이 깊다.

 

“어쩌면 우리 모두 약간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341)

 

2. 학자들의 전유물이라는 도그마

 

“경제학의 95퍼센트는 상식에 불과한데 단지 전문 용어와 수학을 동원해서 어렵게 보이도록 한 것뿐이라는 말까지 했었다.”(13)

 

경제학은 난해한 학문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것은 신고전주의 학자들의 학풍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올바른 하나의 답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이를 검증하기 위해 수학과 통계학의 방법론에 과도하게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현실 적합성과는 별개로 내적 논리 일관성 추구에만 매몰된 것이다. 그러니 점점 복잡다단해져서 대중의 지적 수준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 되어버렸다. 경제학자들 끼리의 외계어 같은 용어와 논리로 현실 경제 현상을 설명하니 대중은 그만 마음 문을 닫을 수밖에. 점점 경제학과는 담을 쌓게 된 것이다. 장하준은 이렇게 학자들만의 리그에 머물고 있는 경제학의 문호를 대중에게 활짝 열자고 제안하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경제학 이론을 펼치고 있다.

 

3. 숫자 맹신 도그마

 

“숫자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산량이나 소득 통계가 생활수준을 정확히 나타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230)

 

그는 경제학자들이 즐겨 인용하곤 하는 숫자를 너무 맹신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생산량이나 소득처럼 간단한 숫자에도 가치 판단과 생략과 과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을 집계하는 과정에서 주부의 가사노동이나 자원봉사처럼 시장 가격 형성이 되지 않거나 선의로 무상 제공하는 용역 등의 가치는 빠져 있다. 중요한 경제 활동임에도 말이다. 또 국민 소득이 높다 해도 명목상인지, 구매력 평가 조정을 거친 자료인지 엄밀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숫자만으로는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이런 피상적인 숫자를 열거하며 이론을 펼쳐나간다. 어떻게 보면 자만이고 한편으론 지적 안일에 빠져 있다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장하준은 경제학에서 숫자의 가치를 도외시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제2부 경제학 사용하기는 온통 실제 숫자의 나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매 항목마다 수치화 작업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검증하고 있는데 이때도 숫자의 의미부터 살핀 다음 진정한 가치를 추적하여 과장된 논리를 바로 잡고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다. 숫자를 너무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맹신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지녀야 도그마를 깰 수 있지 않을까?

 

4. 신고전주의 일변도 도그마

 

경제학계에는 아홉 개 이상의 학파가 존재한다. 그런데 영미 계통의 주류 경제학에선 으레 신고전주의를 바탕에 깔고 논의를 전개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알프레드 마셜이 체계화한 이후 경제학의 지적 정통성이 그들에게 있다는 자만감에 잔뜩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학의 여러 영역 가운데 생산 부문 보다는 소비 영역에, 정부 부문 보다는 시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런 신고전주의 일변도의 이론과 정책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들은 극도로 배타적인 포즈를 취하며 여타 대안적 사조들을 폄훼한다. 유일신을 떠받들 듯이 말이다. 장하준은 ‘망치를 쥔 사람’은 다른 연장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수가 있다며 그런 편협한 색맹이 되지 말고 다양한 임무에 맞춘 서로 다른 연장이 달린 스위스 아미의 나이프를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비유를 들어 말한다. 특히 그는 상황별로 그에 걸맞는 다양한 경제학 사조들의 조합을 제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경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면 MDKI(마르크스주의와 개발주의와 케인스학파와 제도학파)를 두루 아우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기업 작동 원리를 살피려면 SIB(슘페터학파와 제도학파, 그리고 행동주의)를 통합하여 접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야말로 백화제방에 이종교배를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5. 시장 신봉 도그마

 

경제학자들, 특히 주류 신고전주의 학자들은 시장의 자동 조절 기능을 맹신한다. 거의 신앙 수준이라 보면 될 것이다. 이런 도그마에 젖어 있으니 다른 현상이나 대안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밖에. 시장의 실패가 뻔히 드러나도 정부의 실패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애써 외면한다. 그러니 경제 침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재정, 금융 정책에 대해 무용론을 제기하며 쐐기를 박는다. 분배 정의나 공정 거래를 위한 개입도 바라지 않는다. 역효과가 크다는 논리를 내세워 시장 자율로 모든 것을 맡기자고 강변한다. 이런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탓에 세월호가 침몰하고 중소기업은 몰락하고 소비자는 비싼 독과점 제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으며 분배에서 소외된 자들은 기아선상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장하준은 특히 분배 불공정이나 불법 금융관행 등에 대해 정부의 강력하고 단호한 개입을 주문한다. 그래야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건전하게 운영될 수 있다고 믿는다.

 

6. 자유무역이 유일한 원리라고 믿는 도그마

 

[사다리 걷어차기]에서부터 장하준은 자유무역이 유일한 무역정책이 아님을 강력하게 설파해왔다. 오늘날 자유무역을 신봉하고 있는 미국이나 영국도 한때 극단적인 보호무역 정책을 폈던 전력이 있음을 보여주며 말이다. 그런데 주류 경제학자들은 리카도의 비교우위설부터 이어지고 있는 지적 전통에 입각하여 자유무역이 모든 나라에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산업이 유치 단계에 있는 개발도상국이 선진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링 위에 오른다면 승부는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그래서 나라별로 발전 단계별로 무역 전략을 다르게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호무역이 한 나라의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암적인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음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다.

 

7. 금융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도그마

 

최근 경제학의 인재들은 거의 금융계로 몰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스트리트로 대변되는 금융업이 아직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금융업계는 파산해도 종사자는 인센티브를 챙기는 등 도덕적 해이도 극에 달하고 있다. 장하준은 이런 경향에 준엄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는 작심한 듯 월스트리트에서 개발된 신종 금융상품에 대해 일종의 신용 사기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산업, 특히 제조업이 거세된 금융 중심의 성장 모델은 사상누각임을 역설한다. 그의 논리는 자연스레 금융업 규제 강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8.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장하준은 경제학계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도그마를 하나씩 짚고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을 제시한 다음,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실천적 대안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정통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보기 드문 정의적 영역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대중들이 능동적인 경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능동적 경제 시민이란 경제 문제에 의식적으로라도 관심을 가지고 경제학을 전문가들의 영역으로 치부하여 백안시하지 않으며 기초적 경제이론 학습에 참여하는 깨어있는 존재라고 상정한다. 이런 능동적 경제 시민은 자신만의 견해에 빠져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경제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도그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게 애쓸 때 비록 암울한 현실에 직면하여 지적으로 비관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의지적으론 낙관하며 상황에 맞설 수 있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의식화된 경제학자와 정치인의 선도적 역할이 필요함도 그는 놓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쉽고 단순한 금융 상품이 개발되도록 지도하고, 경제 정책을 펼 때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정하는 것 등을 통해서 말이다. 하여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도그마에 젖어 있는 경제학계와 대중들에게 맹신과 아집에서 벗어나 이성을 회복하고 정의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맞춤형 매뉴얼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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