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특이한 형식이어서 좀 뜬금없다

 

사람은 얼마만큼 바뀔 수 있을까? 성형외과 광고는 경이로울 정도로 외모가 달라지는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성형 전과 후, before와 after를 대조하여 변화의 효과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외모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 정신세계도 급격한 개조가 가능할까? 요즘 출간되고 있는 많은 실용서들은 내면도 뜯어고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과학적 원리를 토대로 한 행동양식 몇 가지를 유형화하여 제시한 다음 누구든지 이를 따르기만 하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권고한다. 이 책도 일견 그런 부류의 실용서로 읽힌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아니 뜬금없단 생각이 들 정도로 실용서의 정형화된 문법을 깨뜨리고 있다. 오늘 여기 우리에게 적용 가능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려면 당연히 시의적절한 소재와 근대적인 방법론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천여 년 전 생존했던 공자와 그 제자들의 삶에서 비롯된 훈수라니! 이게 과연 먹힐 수 있을까 하는 의문부호부터 떠올랐다. 물론 동양 정신사, 아니 인류 문명사 전체를 통틀어 공자만한 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위상은 절대적이라 하겠다. 유가의 창시자로 한문학이나 동양철학뿐 아니라 인류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스승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쩜 그의 케케묵은 생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까 하는 점이다. 회의가 앞섰다. 시대착오적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갸웃거리며 앞부분을 읽어나가는데 어느 순간 끄덕거리며 따라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우간린의 필력이, 아니 그의 내공이 공자 사상의 유의미성을 살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공자와 제자들의 사상이 오늘 여기 우리에게도 적용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낡아빠진 고루한 관념이 아닌 생명력 있는 지혜로써 말이다.

 

그는 특이한 형식으로 공자와 우리의 내면을 잇는 연결고리부터 마련한다. 고답스런 공자의 사상과 참신한 스타일에 목매다는 현대 독자와의 간극을 메워야 그의 사상이 살아있는 지혜로 다가올 수 있겠다고 헤아린 때문이리라. 그의 대안은 역발상 그 자체라 하겠다. 스토리텔링과 화자의 내레이션 기법을 사용하여 낯설지 않게 공자를 오늘 여기 우리 삶의 현장으로 불러낸다. 이천여 년 전 실존인물들의 모습을 픽션을 가미한 에피소드로 엮어내고, 그 얘기를 슬몃 오늘의 상황에 접목하여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도출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내러티브 화자가 공자가 아니라 제자 자공이란 점도 이채롭다. 그는 시점을 넘나들며 공자의 삶과 제자들의 다양한 모습이 어우러진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고 있다. 파격에 파격이라 하겠다.

 

의외의 내용에 눈을 뗄 수 없다

 

형식뿐 아니라 서사도 범상치 않다. 흔히 떠올리는 스테레오타입과는 동떨어진 것이어서 걱정스럴 정도였다. 성인군자의 전형이요, 화자의 스승인 공자의 모습을 신랄하달 정도로 가감 없이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윤색하여 성스럽게 부각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발리다 혹시 후손들이나 학계의 지탄을 받는 건 않을까 저어되었다. 자공의 눈에 비친, 아니 우간린이 되살려 낸 공자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초인이 결코 아니었다. 제자들과 같이 울고 웃고 더불어 호흡하며 인간적인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더도 덜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 사소한 일로 제자들을 꾸중하고 더러는 호통을 치다 밖으로 내쫒는 등 육체적 체벌도 가했다. 자주 흥분하여 분노를 표출하고 심지어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이렇게 진솔한 모습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으니 어찌 빨려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연 이야기에 몰입할 수밖에. 또 눈길을 끄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단순히 학문이나 철학적 차원에서만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에 비추어 우리 삶에 활용 가능한 원리를 발굴해내고자 애쓰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이나 행적이 결코 박제된 이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혜이자 여전히 유효한 행동지침임을 우간린은 증명하고 있다 하겠다.

 

배웠으면 바뀌어야 한다. (증삼의 경우)

 

스토리 라인을 맛깔스럽게 살리고 있는 것은 제자들의 다양하고 독특한 성향과 행적이다. 자공의 관점에서 그린 행단의 동료, 후학들의 일화에는 인간사 모든 면모가 녹아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문수학하는 이들 가운데는 매력적인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정의롭고 무술에 조예가 있지만 물불 가리지 않는 성미 때문에 결국 비운의 최후를 맞은 자로나 유상(儒商)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외교와 화술의 대가 주인공 자공 등 숱한 인물이 우뚝 다가온다. 그런데 칠십이 명의 도반 가운데 유독 한 명이 계속 눈에 밟혀 그의 행적을 예의주시하며 쫓곤 했다. 왠지 증삼에게 자꾸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그는 행단에서 가장 꾸지람을 많이들은 제자이다. 그만큼 결함이 많다는 얘기다. 그런 나약한 모습에 연민의 정이 느껴졌던 것일까? 안쓰러운 모습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첫 에피소드부터 증삼이 호되게 당하는 얘기로 시작된다. 아비가 매를 때리는데도 저항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며 효를 실천했다고 얘기하는 증삼에게 공자는 일갈한다. 무모하게 버티다 자칫 아비를 살인자 만들 뻔 했다고 질책하며 문밖으로 내쳤던 것이다. 이야기는 증삼의 경우를 교훈삼아 학문의 유연성을 길러야 하겠다는 자공의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면서 꼭지 말미에 붙인 필자의 코멘트가 인상적이다.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남의 경험이나 방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융통성을 잃게 된다. 살아 있는 지식을 배워 활용해야 한다.(32쪽)

 

증삼은 또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분에 넘치게 값비싼 돼지를 잡기도 하고 과일을 삶아달라는 시어미의 말을 듣지 않았단 이유만으로 아내를 내쫓는 등 목석과 우둔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둔한 증삼을 공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교육시켰다. 꾸중을 많이 했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고 그만큼 변화의 가능성도 엿보인다는 판단에서일 게다. 공자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각별하게 증삼의 교육에 골몰했다. 특히 융통성 있게 실용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부터 가르쳤다. 좋은 동기라도 바람직한 효과로 이어져야 한다며 인(仁)과 지(智)의 조화를 여러 차례 강조했던 것이다. 또 시를 짓고 예악을 즐기는 등 인간 본연의 정서에 충실할 것도 권했다. 지, 정, 의를 두루 아우른 통합적 교육을 실천한 셈이다. 이는 다른 제자들을 지도한 방식과는 차별성을 보이는데 오늘날로 치면 개별화 교육에 해당한다 하겠다. 공자는 원리원칙에 얽매어 꽉 막힌 유자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내 귓가에는 때때로 선생님이 시를 읊던 소리, 거문고를 타던 소리, 그리고 껄껄 웃던 소리가 맴돌고는 했다. 분명 선생님은 교육자일 뿐 아니라 감정이 풍부한 분이기도 했다.(66쪽)

 

이렇게 잘못된 상황마다 문제의 본질을 짚어가며 하나하나 교정해주는 스승의 각별한 지도와, 지정의를 아우른 총체적인 교육을 받은 증삼은 나날이 학문이 무르익고 인간적으로 깊어갔다. 그런 성숙과 발전 과정을 지켜본 공자는 손자인 자사의 공부를 증삼에게 맡기며 그를 칭송했다. 증삼은 더욱 갈고 닦아 유교 4대 경전 중 하나인 대학을 저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괄목상대란 말은 이런 경우를 위해 생겼다 할 정도다. 그의 학문 수련 전과 후, before와 after를 비교해보면 사람을 알아본 공자의 혜안과 맞춤형 교육과정의 탁월성에 무릎을 치게 된다. 공자는 학문을 넘어 전인격적인 변화를 꾀했던 것이다.

 

증삼을 넘어 복자천을 바라보다. (나의 경우)

 

우둔하고 고집이 세기로는 증삼을 뺨칠 정도인 나에게 공자의 교육 방법과 지혜로운 지침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간 꼬치 속에 웅크리고 있는 애벌레마냥, 배운 데서 한발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자탄(自歎)만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꽁생원 증삼을 훈계하던 공자의 일갈이 짜릿한 전율로 사무친 것이다. 한 가지에만 빠지지 말고 다른 측면도 살피라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여 일의 성격과 진행과정을 심사숙고하라는 음성이 귓전에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선택의 고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릴 때마다 공자의 음성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으면 좋겠다.

 

스스로 돌아볼 때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절감하곤 한다. 여러 모로 미흡하단 생각에 쭈뼛거리기 일쑤다. 그런데 공자가 제자들을 평가한 대목에서 잠시나마 위로를 받았다 할까? 그 고명한 제자들도 하나같이 결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오히려 심란해졌다는 게 더 맞겠다. 조목조목 든 제자들의 단점이 딱 나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안회는 성실하지만 융통성이 없고, 자공은 총명하지만 굽힐 줄을 모르고, 자로는 용감하지만 두려움이 없고, 자장은 위엄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섞이기가 어렵기 때문에 나는 이 넷을 다 함께 갖고자 하느니라.(353쪽)

 

전언(傳言)의 요지는 허물에 매몰되지 말고 인의와 지혜를 갖추란 얘기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꼽는 이 책 최고의 캐릭터는 복자천이라 하겠다. 공자는 그를 현명하고 능력 있으며 덕성을 갖췄을 뿐 아니라 용맹하기까지 하다고 칭찬했다. 공자가 행단에서 가르친 커리큘럼은 어쩜 제2의 복자천을 길러내기 위한 과정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지난(至難)한 일이겠지만 복자천 같은 단계에 이르려면 우선 안회, 자공, 자로 및 자장의 결함을 반면교사로 삼는 게 급선무다. 유연하게 굽힐 줄 알며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기르고, 타인과의 관계성을 중시하는데 진력하는 것 말이다. 특히 사회성 결여가 우려되는 나로서는 특단의 대책과 노력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퍼뜩 떠오른 게 다른 이가 다가오도록 기다리기보다 나부터 먼저 손을 내밀어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열게끔 이끌어야겠다는 것이다. 우선 주변 가까운 이들부터 시작하여 낯선 이들에게까지 진정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언젠간 내 마음이 전해질 거라 믿으며. 또 다른 이의 단점을 비판하지 말고 혀를 너그럽게 관리하란 충고도 곱씹어야할 대목이었다. 사회성을 기르기 위한 덕목으로 말이다. 일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 보다는 뒷전에서 평가하고 분석하는 타입인 내게 타겟을 맞춘 경고의 메시지 같았다. 굳이 남을 끌어내려야 내가 돋보이는 게 아닐 테다. 남이 미처 알아주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자강불식하라는 권고를 뇌리에 붙박이도록 새겨야 하겠다.

 

그런데 이런 다짐이 일회성으로 그쳐선 안 될 텐데 걱정이다. 견조한 리듬을 유지하려면 종종 각성시켜 줄 자극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우간린의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재독, 삼독해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격하지 않고 부드럽게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세상 이치를, 나의 나됨을 일깨워주는 그의 얘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내면이 정리되고 조금씩이나마 발전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래서 늘 손에 닿는 곳에 놓아두고 마음결 출렁거리고 심사가 흐트러질 때마다 꺼내 읽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공자와 나를 이어준 우간린의 지혜로운 전언을 되새기게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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