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소희와의 뜨겁고 아찔했던 사랑에 눈이 멀어 사제의 길을 내려놓고 사랑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려 했던 요한, 그러나 선택의 기로에서 요한은 끝내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요한을 이끈 것은 군데군데 놓여 있던 여러 겹 인연의 고리였다. 언제나 그 손길이 요한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연은 어쩜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높고 큰 뜻, 인간을 향한 섭리에 의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그토록 듬뿍 받게 된 것일까? 요한 주변의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몇 가지 짚어본다.

 

1. 요한이라는 이름

 

정요한 신부, 그에겐 많은 이들이 배경이 되고 후원자가 되려 했으며 인도자를 자청했다. 심지어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까지 요한 신부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정을 나누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끌린 데에는 이름도 한 몫 했다 하겠다. 요한이라는 이름과 관련된 인연이 그를 한결 정겹게 봤던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도 향기는 여전하다고 이름의 헛됨을 꼬집기도 했지만 한 인간을 대할 때 그의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법이다. 이 책에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평생을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요한에게만 들려준 이들이 여럿 나온다. 그 중 죽음을 앞둔 독일인 토마스 수사의 눈물겨운 고백은 압권이라 하겠다. 그런데 토마스 수사가 요한에게 꼭 얘기를 들려주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깊은 영성과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요한이라는 이름에 끌린 면이 더 강했다. 토마스 수사도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각별한 정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함경남도 덕원 소재 수도원이 있을 때 함께 했던 친구 수도사 요한 루드비히 신부에 대한 애틋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런 요한 신부의 그림자가 새내기 수사 수련생이던 정요한에게서 어른거렸던 것이다. 이 책엔 또 한 명의 요한이 등장하는데 소희와의 결별로 아파하며 성직을 포기하려던 시점에 생을 버리려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도원을 찾아왔던 모니카의 아들이다. 그녀는 완고한 부모에게 미혼모가 된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죽음을 택하기 직전 요한에게서 위로를 얻고 마음을 돌이킨다. 요한의 일상적인 몇 마디 말이 그녀에겐 구원의 음성이었을까? 금세 평정을 찾은 모니카는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태어날 아기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이겠다고 약속한다. 요한의 사역이 같은 이름을 지닌 아이에 의해 면면히 이어지게 된 것이다.

 

2. 북한에서의 고초

 

이 책에는 유독 요한에게만 평생 묵이고 삭힌 얘기를 털어놓는 이들이 많다. 토마스 수사부터 소희와의 아릿한 사랑으로 성직을 포기하려던 시기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하나님의 길을 넌지시 일러주던 할머니, 그리고 미국 뉴저지 뉴튼 수도원의 마리너스수사까지 다들 왜 요한에게 입을 열었을까? 그것은 요한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린 면도 있겠지만 이보다 더 큰 차원의 초월적 섭리가 작용했다 하겠다. 마리너스수사가 어떻게 요한의 인간미를 알았겠는가? 이 모든 일들은 인간의 역사를 주재하는 전지전능한 분의 섭리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 섭리는 하나로 꿰어진다. 그들 얘기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하나같이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북한에서 당한 말할 수 없는 고초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현존이다. 이런 인연, 아니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을 하나로 잇는다.

 

토마스 수사는 함남 덕원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에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북한을 장악한 공산군은 그들을 자강도 옥사덕 수용소로 몰아놓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때 토마스 수사의 친구였던 요한 루드비히신부가 거름더미 위에서 순교하기도 했다. 북한 감옥에 갇혀 있던 토마스 수사는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귀국했다가 다시 남한에 베네딕도 수도원을 재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땅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고난 가운데서도 끝끝내 이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들려주며 요한에게 용기를 북돋우던 토마스 수사님의 기도와 간구가 정요한을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

 

평생 여장부로 약한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억척같이 사업을 일구던 할머니도 헤매는 손자를 보고선 여리디 여린 모습으로 돌아간다. 한국전쟁 시 흥남부두 철수 현장을 생생하게 들려주며 하나님의 섭리를 들려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죽고 못 살던 애틋한 부부. 그런데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피난민들의 빅토리아 메러디스호 승선을 돕던 할아버지는 어린애를 살리려다 자신은 배에 오르지 못하게 되고 만다. 평생 할아버지를 마음에 담고 살던 할머니가 들려주던 두 분의 곡절 많은 인생과 우리 민족의 고초를 전해 듣고 정요한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한다.

 

그런데 뉴튼 수도원 인수 차 들렀던 미국에서 마리너스 수사를 만나고 정요한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 전율한다. 마리너스 수사가 바로 빅토리아 메러디스호 선장으로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이끌었던 것이다. 더구나 마리너스 수사가 성직을 택하게 된 계기가 젊은 엄마와의 약속 때문이었다는데 그때 아기를 업고 있던 이가 바로 할머니라니.

 

3. 모두가 사랑한 요한

 

그런데 이 모든 인연의 중심축엔 정요한이 놓여 있다. 그를 통해 얽히고설킨 인연이 하나님의 섭리가 되고 결국 은총으로 다가오게 된다. 요한에게 모두들 마음 깊숙이 담아두었던 얘기를 꺼냈는데, 거기엔 요한의 영성과 인간적인 매력이 작용하고 있다.

 

그의 영성은 얼마나 깊게 사무치는지 모를 정도이다. 요한이 과거를 담담하게 회고하고 있는 진술 방식이어서 정작 자신의 영성에 대해선 별로 언급이 없지만 몇 가지 사건이나 등장인물들과의 관계만 봐도 요한의 영성의 폭과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수도원의 종소리가 울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요한은 하늘에서 푸른 밧줄 같은 사다리가 은은하게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을 느낀다.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하며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인간에게 충만하게 흩뿌려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감한 것이다. 그는 수도원 하늘을 수놓는 별을 보고도 하나님을 느낄 정도였다. 십자가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선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에 눈물겨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의 영성은 높푸르고 깊다. 요한은 자주 하나님의 음성도 듣곤 했다. 뉴저지 뉴튼 수도원의 숲에선 참나무 사이를 꽉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도 한다. 이러니 소희도 하나님에게 사랑을 양보할 수밖에.

 

또 요한은 인간적 감성에도 충실했던, 세속적 사랑도 목마르게 간구했던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냉혈한이 결코 아니었다. 벼락 같이 다가온 사랑 앞에 고뇌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던 그의 모습은 고결한 성직자보다 인간미 넘치는 솔직한 청년의 그것이었다. 하나님께 왜 대체 내게 이러시냐고 항변하던 그는 영락없는 피 끓는 청춘이었다. 거기다 너그러운 덕성과 빼어난 지성에다 업무 추진력까지 갖추었으니 모두들 그를 좋아할 밖에.

 

4. 요한을 가장 사랑한 이는?

 

그런데 많은 이들 가운데 요한을 가장 사랑한 이는 누구였을까? 다들 끔찍이도 요한을 아꼈지만 이보다 더 할 순 없달 정도로 간절한 마음을 담은 이메일을 보낸 이가 있다. 바로 모니카였다.

 

“어느 날 신부님의 소망이 이루어질 힘이 먼지 하나의 무게만큼 딱 모자랄 때 제 기도가 신부님께 보탬이 될 거라 믿을 뿐입니다.”(307쪽)

 

그러나 모니카 보다, 할머니보다 더 요한을 사랑한 분이 있다. 다름 아닌 하나님, 바로 그분이시다. 얼마나 요한을 사랑했으면 소희와의 그 깜찍한 모습, 결국엔 갑각류 등딱지에 박힌 칼날 같은 상처로 쩔쩔매는 것을 보고도 끝내 놓아주지 않으셨을까? 하긴 다들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일을 맡아야 할 사람이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청춘이 내뿜는 광휘에 휘둘려 그에게 남성을 갈구하던 소희도 안타까이 마음을 접었고, 주변 모든 이들도 유독 각별하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리라.

 

5. 인연...섭리...은총

 

하여 [높고 푸른 사다리]는 요한과 소희의 아릿한 사랑 얘기만이 아니었다. 인간 대 인간의 뜨거운 피, 들끓는 사랑도 담고 있지만 한 차원 높은 더 큰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배후에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인연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연은 넓고 긴 호흡으로 보자면 정교하게 설계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 섭리는 결국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은총, 결국 사랑이었음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