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바탕 긴 꿈을 꾼 것 같다. 그 꿈의 폭과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었다. 독거노인 살인사건을 두고 얽히고설킨 연쇄의 고리가 사뭇 종잡을 수 없게끔 꼬여 나가 사건의 윤곽이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의 결에 색다른 기운이 어려 있는 게 느껴졌다. 보통 추리물에서는 사건은 비록 해결되었다 해도 느와르적인 여운이 한동안 이어지기 마련인데 [몽환화]를 읽고선 왠지 머리가 가뿐해지는 게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를 느긋하게 달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꼬인 실타래가 겨우겨우 풀리는 힘겨운 과정을 견뎌왔으면서도 묵직하고 찝찝한 응어리가 전혀 남아있지 않는 듯했다. 미스터리물을 읽다 겪곤 하는 악몽이나 흉몽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꿈자리가 깔끔했다.

 

왜일까, 이런 의외의 느낌은 뭘까? 조금 혼란스러웠다. 현실이든 픽션이든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것이면 논리회로가 엉키면서 사고를 그곳에 붙박게 한다. 어쩔 수 없이 곰곰 따져보게 만든다. 왜 섬뜩한 살인사건에 대한 얘기가 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꿈결같이 다가올까? 혹 사이코패스처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일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헤아려보니 몇 가지 짚이는 대목이 있었다.

 

1. 아름다운 인연의 연쇄를 보여주고 있다.

 

추리물은 대개 질기디 질긴 악연에서 이야기가 비롯된다. 음모와 배반과 복수의 고리가 이어지며 사건의 얼개가 짜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섬뜩한 광기와 반사회적인 이상심리가 지배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며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데 [몽환화]는 좀 다르다. 아니 달라도 사뭇 다르다. 아름답게 얽힌 인연의 연쇄가 여러 갈레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인연의 테마도 눈물겹게 인간적이다. 아니 반(反)추리물적이라 하는 게 좋겠다. 속죄와 보은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사건 해결의 전면에 등장하여 방향타를 쥐고 있는 단짝 가모 소타와 아키야마 리노는 관계없어 보이는 인연을 한 곳으로 잇는 두 축이다. 그들은 소울 메이트처럼 닮은꼴이었다. 믿고 선택한 길로 매진해 왔는데 어느새 미아가 되어버린 외로운 이방인들이었다. 수영과 원자력발전 연구라는 외길을 달렸는데 그게 무의미한 일이란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로부터 여러 인연들이 엮이게 된다.

 

리노의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 그는 이번 사건의 희생자였다. 독거노인인 슈지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미제 사건으로 묻히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우연히 도와주었던 유타에 의해 불씨가 되살아나게 된다.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이제는 관계가 멀어져버린 아버지에게 범인을 꼭 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사건은 해결 쪽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유타의 아버지 하야세 형사가 사건 관할 담당이었던 것이다. 유타와 할아버지는 평소 편지를 주고받으며 멘토와 멘티 관계를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유타는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나가며 회복된다.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신을 탓하던 유타가 할아버지의 곡진한 편지에 힘을 얻어 건전한 내면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비밀스런 카드를 교환하며 결국 사건을 해결하고야 마는 하야세 형사와 소타의 배다른 형 가모 요스케. 평소엔 데면데면 아빠를 외면하던 아들 유타가 마음을 열고 간곡하게 부탁한 까닭에 동기 유발되어 혼신을 다하는 하야세 형사와 가문의 비밀을 모두 안고 은밀하게 활동하던 가모 요스케도 인연의 힘이 연결한 관계였다.

 

소타의 중학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이바 다카미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가 돌연 결별을 선언한 탓에 소타의 청소년기는 까맣게 타들어갔을 밖에. 끈질긴 인연은 우연을 필연으로 돌리는 법. 콘서트장에서 만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던 다카미는 마지막에 소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간의 전말을 들려준다.

 

2. 가문의 도덕적 책무라는 고전적 의제를 제기하다.

 

아련한 추억 속의 그녀 이바 다카미가 정체를 밝혔을 때 소타는 왠지 어른스런 모습에 아득해한다. 자신과는 다른 낯선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와 대화하는 가운데 다카미가 왜 중학교 시절 자신을 떠나갔는지, 또 왜 성숙해 보이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문의 숙명 때문이었다. 이바 가문과 가모 가문의 도덕적 책무가 그들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또 가문의 운명을 의식하고 받아들인 다카미였으니 소타같은 조무래기 철부지와는 달랐을 테고. 요즘은 가문의 전통을 잇는다는 개념이 거의 사라진 시대다. 더구나 이익을 얻는 것과는 무관한, 가문이 진 빚을 갚아야 하는 부담스런 일이라면 다들 혀를 내두르기 십상이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의제, 어쩜 케케묵은 덕목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것도 두드러지게 드러나 공치사를 받는 게 아니라 몇 대에 걸쳐 은밀하게 이어져오는 사회에 대한 속죄와 보은이라는 테마를 말이다. 마성의 씨앗을 유포하여 확산시켰다는 자책에서 비롯된 가문의 원죄를 짊어지고,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들. 그들은 경찰관 가모 가문과 의사 이바 집안에 주어진 의무감에 오롯이 복무하였다. 이런 작가의 설정은 나이 든 독자들에게는 과거의 가치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젊은이들에겐 무감했던 아름다운 덕목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고요히 자신과 가문의 전통을 짚어보는 가운데 마음결이 정돈되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이끈다.

 

3. 루저(loser)들에게도 발언권을 주는 인간미가 담겨 있다.

 

현대 사회체제는 승자 독식 시스템이다. 루저에겐 재기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몽환화]엔 루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범인 쪽, 악한들이 아니다.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선한 역을 맡은 이들 가운데 낙오자들이 포진해있는 것이다. 살인사건 관할 담당인 하야세 형사는 불륜 탓에 이혼하고 아들 양육권마저 빼앗긴 채 홀로 쓸쓸하게 맞을 정년 이후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던 자였다. 그런 쓸모없는 자에게도 히가시노는 핀 조명을 비춘다. 이 사건 해결 과정에서 의미 있는 발언권을 부여하여 자존감을 맛보게 한 것이다. 용기백배 분발할 수 있는 장치를 여럿 설정해두고 있다. 낮은 직급에 영향력도 별로인 그의 얘기를 상부 엘리트들이 귀 기울여 들어주게 배려한다. 주변인에서 주역으로 우뚝 서게 만든 것이다. 루저들에게 패자 부활의 기회를 제공하여 다시 치고 올라가게 만드는 작가. 이보다 더 따뜻한 얘기는 없을 듯하다.

 

밴드의 리더에서 급전직하 추락해버린 오스기 마사야. 완전 인생 막장으로 몰린 자다. 그가 어느 날 리노와 사촌동생인 도모키를 교도소로 부른다. 할아버지에 대한 일을 사과하던 그는 리노에게 의외의 말을 건넨다. 자살한 사촌 나오토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의 눈부신 재능을 일깨워준 것이다. 궁지에 몰린 자로 하여금 타인이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발언하게 자리를 마련해준 게이고의 설정에 다시 한 번 무릎을 치고 말았다. 더구나 마사야의 격려에 고무되어 얼음공주 리노의 마음이 움직이는 기적까지 연출하고 있으니 뭉클해질 수밖에.

 

4.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인간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추리물에서도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던질 경우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 범인을 악한으로 몰고 간 사회적 환경에 대한 환기 정도에 그치기 일쑤다. 이런 스테레오 타입도 [몽환화]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현재 일본 사회, 아니 온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 중단과 발전소 해체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해 히가시노는 인간적인, 아니 지극히 합리적인 대안을 들고 나왔다. 의식 변화에 방점을 둔 그의 제안은 울림이 무척 깊다. 소타가 전공하고 있는 원자력공학은 현재 존폐위기에 처해 있다. 전공자들은 취업도 취업이지만 젊음을 바친 학문이 사회악 취급당하는 가운데 자존감 손상으로 허무에 빠져 있다. 그런 소타가 몽환화 사건을 겪으며 사회적 책무에 대해 새삼 눈뜨게 되고 이를 토대로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게 자신이어도 괜찮지 않겠냐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어차피 대세는 탈원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누군가는 궂은일을 기꺼이 담당해야만 깔끔하게 마무리될 테니 원자력공학의 사회적 필요성은 여전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다들 선망하는 일,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는 분야에도 인력이 배치되어야 하겠지만 부담스럽고 구차한 쪽에도 인재가 투입되어야 사회적 엔트로피의 과도한 증가를 피할 수 있다는 작가의 소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런 차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탈원전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5. 꿈을 꾼 후에

 

이렇듯 히가시노 게이고의 묵이고 삭힌 내공이 배어 있는 [몽환화]는 추리물의 정형을 무색하게 만들며 여러 모로 새로운 지향을 열어 보이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사건 현장, 복수와 음모가 난무하는 허무한 느와르가 아니라 공감과 위로와 회복의 과정을 꿈결처럼 엮어나가고 있다. 아름다운 인연들이 선하게 이어지면서 끌어주고 밀어주어 다들 슬기롭게 자신과 가문의 미궁에서 빠져나오게 이끈다. 개인들이 그러하듯 우리 사회의 난마처럼 얽힌 문제도 지혜를 모으면 해결하지 못할 게 없다는 것도 일깨우고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어쩜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먼 곳으로 혹은 어린 시절로 여행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리라. 정말 몽환적이었다. 그러니 좋은 꿈을 꾸고 난 다음 느껴지는 가뿐한 여운에 잠겨 있을 밖에. [몽환화]에서 비롯된 깊은 울림에 취해 한동안 그 자장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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