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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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원시적이라고? 천만에 복수는 사고하는 인간의 반사작용이야. 행동과 일관성의 복잡한 혼합물로, 지금까지 인간 외의 다른 종은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수의 실행은 그 자체로 너무 효과적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가장 복수심이 넘치는 사람만이 살아남았지. 복수 아니면 죽음. 서부 영화 제목 같지? -(중략)-복수는 문명의 기초야.(456쪽)

 

이런 현학적인 내용의 이메일을 보낸 S²MN는 누구일까? 모든 과정을 정교하게 세팅해 두고 마치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빤히 내려다보듯 군림하던 복수의 화신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리고 정체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던 그(혹은 그녀?)는 왜 어이없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을까? 그게 자신을 모욕했던 세 사람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복수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네메시스]는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투성이로 점철된 스릴러이다.

 

복수는 다층적으로 얽히고설켜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보통 스릴러물의 전형은 두드러진 악한이 한 명으로 수렴되기 마련인데 [네메시스]에서는 이런 스테레오타입도 적용되지 않는다. 처절한 복수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이는 사실 눈이 좀 먼 상태이다. 그러니 자칫하면 감정에 휘둘려 증거를 남기기 십상인데 그(혹은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다. 이글거리는 복수의 감정을 냉정하게 통제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교묘한 속임수로 선량한 이웃에게 회복 불능의 장애를 안겼던 악동이자 위장술과 연기의 대가인 그(혹은 그녀)는 은행 강도로 위장하여 사적인 복수를 실행한다. 사랑이 미움으로, 미움이 다시 짙은 증오로, 마침내 처참한 복수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울렁거릴 만도 한데,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치밀하게 구성한 로드맵대로 결행했던 것이다. 더구나 희생자들은 그와 가장 가까웠던 둘이었으니.

 

이런 냉혈한들의 속내는 어떨까? 그, 혹은 그녀의 심리를 들여다 본 에우네 박사의 견해가 무척 흥미롭다.

 

“자신이 독창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너무 과장된 나머지 자신은 끝없이 성공해야만 한다는 꿈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하지. 이런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모욕한 사람에게 복수하고픈 욕구가 다른 욕구보다 강한 경우가 많아. 이걸 ‘나르시시스트의 분노’라고 부르네. 미국의 정신분석가인 하인즈 코헛은 이런 사람이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이 당한 모욕(사실 이 모욕이란 것도 보통 사람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어)을 갚아주려는 과정을 설명했지. 예를 들어, 표면적으로는 그냥 평범한 거절을 당했을 뿐인데도 이런 나르시시스트는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끊임없이, 강박적일 정도로 단호하게 노력한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죽음까지도 불사하면서.”(592쪽)

 

에우네 박사는 둘의 내면을 고스란히 짚고 있다. 자존감 과잉, 혹은 오기로 똘똘 뭉쳐진 이들의 과욕, 또는 왜곡된 소신이 복수로 나타난 것이라는 얘기다.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몰입한 그들이니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할 밖에. 하여 그, 혹은 그녀의 정체는 끝내 오리무중이었다. 단서는 거의 없거나 변형되고 위장된 상태여서 증거라고 할 것도 없는 지경이다. 집요한 복수광들은 해리의 두뇌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늘 한발 앞서간다. 그래서 그들은 일견 승자인 듯 보인다. 노여움과 아픔에 치를 떨며 범인을 좁혀가던 해리 반장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변죽만 울리다 스러져버리는 꼴이라니.

 

“사랑과 미움 모두 전쟁에서 이긴다고. 그 두 가지는 샴쌍둥이처럼 떼어놓을 수 없어. 전쟁에서 지는 건 분노와 연민이야.”

“그럼 우리 둘 다 지겠군요.” 해리가 신음했다.(586쪽)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복수의 아이콘은 해리 반장이다. 끈질긴 집착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하겠다. 그는 불쑥불쑥 돋아나는 사적 복수 감정을 공적인 임무로 치환할 줄도 안다. 그리고 알콜 중독과 금단 증상을 오가면서도 초인적인 오기 하나로 버텨낸다.

 

“우리 경찰이야말로 차갑고 이성적인 응징으로 위장한 이 사회의 불타오르는 복수 아니겠어? 그게 우리 직업이라고.”(257쪽)

 

치밀한 두뇌와 창의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리는 점점 사건의 실상에 다가가게 된다. 해리의 통찰력은 전지적 시점에서 메일을 보내던 이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홀레 반장의 눈에 자살과 은행 강도 사건의 본질이 빤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해리는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걸 직감한다. 더구나 자신을 안나 베트센의 살인범으로 몰아가려는 음모에 직면하면서 이런 의구심은 한층 구체화된다. 결국 해리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악의 축을 발견하고 만다.

 

카타르시스를 거쳐 서서히 결말로 향해가던 이야기는 여기서 급반전이 이루어진다. 여러 형식을 오가며 변주를 거듭하던 교향곡에 새로운 유형의 갈등구조가 덧보태지며 전혀 다른 유형의 악장이 전개되듯 말이다. 하지만 그 악의 축은 곧 발각될 것으로 보인다. 그(혹은 그녀)의 본심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냉정한 복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잘 나가는 동료에 대한 질투심의 발로이자 사적 이윤 추구라는 목적을 위해 악행을 세팅한 자들이니. 결국 감정이 잔뜩 개입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데 눈이 먼 경우는 얼마 가지 않아 꼬리가 잡히는 법이다. 그런데 빤히 보이는 그(혹은 그녀)를 체포하고 응징하지 못한 채 이 책은 끝을 맺는다.

 

한 편의 복잡다기한 교향곡이 끝내 미완성인 채 막을 내린 셈이다. 치밀한 플롯에 경탄하며 무릎을 친 게 몇 번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던 요 네스뵈의 필력으로 미뤄 볼 때 결말을 이렇게 허술하게 놓아둘 리 없을 텐데…. 못내 아쉬운 감에 휩싸여 허무하기까지 한 마음을 추스르고 헤아려보니 작가의 의도가 읽혀지는 듯했다. S²MN, 곧 NeMeSiS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여 해리가 악의 축을 일망타진하고 마침내 복수의 고리를 끊는 것은 다음에나 기대해야 할듯하다. 복수의 여신이 들고 있던 채찍이 국가 공권력을 상징하는 칼로 슬몃 바뀌며 정의의 여신으로 화하는 장면 말이다. 아니 이게 어쩜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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