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다 하지 못한 -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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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긴 기다림만 여기 남기고… (4집 [회귀]의 한 대목)

 

너무 강한 빛을 뿜은 탓일까? 그래서 내뿜은 빛의 열기에 자신도 그만 녹아버린 것은 아닐까? 짧은 기간 그토록 집약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 부어버려 더 이상 버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어쩜 그의 죽음은 요절한 천재의 전형 같다고나 할까? 김광석, 그는 세상이 맡긴 모든 소임을 그때 이미 다 마무리했다고 할 수 있겠다. 노래하는 가객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삶의 비밀스런 자락을, 노래의 절정을 스스로 맛보고 우리들에게 알려주었으니.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오롯이 다 쏟아 부었으니 미련 없이 그의 별로 돌아간 것이리라.

 

그의 노래는 시대를 넘어, 세대를 초월하여 듣고 불리어지고 있다. 심지어 비오는 날 장보러 나왔던 할머니까지도 [사랑했지만]을 듣고 아연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요즘 너무 범람하는 게 아닐까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창력을 뽐내는 이들은 으레 선곡 레퍼토리로 그의 노래를 빼놓지 않는다. 그만큼 그의 노래는 생명력이 징하달 정도로 길다 하겠다.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김광석, 그런데 그의 노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의 삶의 행적이나 의식의 괘적은 덜 알려진 편이다. 하여 어림짐작으로 짚어보기만 했는데 이번에 그 고민을 덜게 되었다. 그의 행적과 생각의 결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유고 문집 [미처 다하지 못한]을 통해서다. 노래가 아닌 글로써 그의 지난한 삶과 들끓던 내면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처음엔 진지함 반 호기심 반으로 집어 들었는데 내용을 훑다 보니 그렇고 그런 류의 식상한 책이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가수의 신변잡기 정도로 녹록하게 보았다간 소중한 많은 것들을 놓쳐버릴 것 같다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도드라졌던 것이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안목과 성찰의 깊이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속에 어떤 아픔이나 삶의 무게 그런 부분들을 나름대로의 크기로 가지고 삽니다. 대개 팔자려니, 이러면서 인정할 건 인정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지내지요. 헌데 그 친구는 지나간 시간인데도 악착같이 견디려고 하더군요. 한쪽으론 참 바보스럽다 느껴지고 한쪽으론 상당히 부럽더군요. 그래서 친구에 대한 제 바람은 그랬습니다. 만나라. 만나서 잘되면 더더욱 좋겠지만 사람이라는 게 상황이 있고, 주변이 있고, 시간이 있어서 지나보면 사람들은 늘 변한다. 만약 머릿속에 키웠던 그 애 모습과 지금 그 애의 모습의 차이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아, 이게 아닌데 하고 뒤돌아서는 경우, 그 사람을 자기 머릿속에서 혼자 키워왔기 때문에 안 맞아떨어지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건 정말 슬픈 일일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 아무리 그 차이가 심해도 서로 극복하려고 애쓰는 모습, 결과가 어떠하든 지레 걱정하지 말고 지금 네 마음이 그렇다면 만나라.(96-97쪽)

 

친구의 고민에 답하는 현실적인 내용의 글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듯 들려주는 구어체 문장에 담긴 성찰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의 내면의 크기가 느껴진 대목이었다. 이렇게 곡진한 얘기를 들었다면 친구는 분명 김광석의 자장 안으로 빨려들었을 것이다. 충고대로 행동했을 게 뻔하고. (그 후일담도 본문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길...) 그런데 김광석이 이렇게 울림 깊은 얘기를 풀어나가는 중간 중간에 언뜻언뜻 내비치는 몇 마디가 몹시도 마음에 걸렸다. 안쓰럽게도 그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는 듯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어쩌면 인생이란 것이 새벽과 아침 사이에 잠시 암울과 침묵의 세계를 만들고 늦은 아침 햇살로 사라져버리는 안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우연과 우연 속에 벌어지는 필연들은 마치 한 밤의 꿈처럼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략)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새로움을 맛볼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따지기 이전에 몇몇 내 마음속에 각인되어진 아픔들을 생각한다. (중략) 내가 의도함으로 뚫려버린 가슴속의 구멍은 그대로 두련다. 혹 그 누가 찾아온다 하여도 메워지지 않을 구멍이니까.(49쪽)

 

이 대목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가 오버랩 되었다. 뚫려버린 가슴을 안고 허망한 세상을 등져버린 그들이...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은 그의 노래에 담겨 있는 절절한 사연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까닭’이라는 제목의 꼭지에서 사랑했지만, 이등병의 편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외사랑 등에 얽힌 얘기와 이를 부를 때 그가 나타내고자 한 감성의 결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특별히 인간 김광석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채 노래로만 그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의 노래를 제대로 이해하여 감성을 살리고 여운을 남기며 부르려면 그의 삶과 노래에 얽힌 곡절을 알아야 겠기에 말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김광석은 곧 자신에게 닥칠 일을 예감하듯, 그로 말미암아 상심할 우리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결단과 위로의 말을 함께 건넨다.

 

헤어짐과 만남이 세상의 일이라 더 큰 만남 위해

슬픔과 눈물을 여기에 모아 눈부신 헤어짐에 (244쪽)

 

노랫말처럼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꼭 들려주고 싶다. 김광석, 그대 때문에 한 시절, 아니 온 생애에 걸쳐 위로받고 일어날 수 있었다고, 당신의 에너지를 나 혼자만 흠뻑 받은 것 같다고, 그러고도 당신에겐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고 사과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더불어 그가 뿜은 광휘가 너무 눈부셔 한 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긴 기다림에 지쳐 나 또한 생의 끈을 놓을 뻔 한 적도 있었다고 슬며시 고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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