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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어디 가? ㅣ 창비청소년문학 54
김한수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평점 :
우리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니 살아도 이건 도무지 사는 게 아니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에 우겨넣어 맹목적으로 따라오기만을 강요하고 있으니 질풍노도 들끓는 아이들 입장에선 죽을 맛일밖에. 그럼에도 어른들은 좀처럼 숨통을 터주지 않으려는 듯 결연하기만 하다. 측은한 시선, 연민의 눈길보단 오로지 외길, 명문대에 진학하여 사회 지도층이 되는 길로만 매진할 것을 주문한다. 기대에 못 미치는 아이들에겐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을 테다.
김한수의 [너 지금 어디가?]엔 온통 루저(loser) 일색이다. 건호도 그 중의 한명이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엄마와 아빠가 성적 만능, 출세지상주의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 눈엔 건호가 결코 루저로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건호가 학원에도 보내주지 않는 너무 무관심한 부모 아니냐며 안달하는 지경이다. 하지만 공부엔 젬병이니 성적 일변도의 체제에선 당연히 소외될 수밖에.
존재감 없이 인생을 허비하던 건호에게 기회가 왔다. 장난을 치다 딱 걸려 벌로 교장선생님 텃밭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동안 갈고 닦은 농사 솜씨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담임은 건호에게 자초지종을 묻게 되고 아빠의 텃밭 얘기를 전해 듣게 된다. 이후 아빠와 친해지게 된 담임은 그예 교장선생님 텃밭을 가꿀 동아리 회장으로 건호를 지명하기에 이른다. 그때부터 건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도 경탄의 눈길로 건호를 바라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루저 건호의 삶에 드디어 볕 들 날이 온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일으키는 것, 그건 결코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인정의 눈길을 보내는, 딱 그 정도면 충분한 것이다. 주위의 시선이 바뀌니 건호도 이제 별 볼 일 없는 애가 아닌 누구에게나 주목 받고 또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될밖에.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자 담임은 “오늘 고생 많았고, 고맙다.”하고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한 뒤 내 어깨를 다독여 주셨다. 담임에게 인사를 하고 교문을 향해 걷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다. 뭐랄까, 내가 굉장히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192쪽)
또 건호를 살린 것은 너는 소중하다는, 네가 있어서 고맙다는 그런 소소한 말 몇 마디가 아니었을까? 간곡한 뜻을 진심에 담아 발언하는 순간 듣는 이는 아마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렇게 건호가 살아나고 그의 위상이 우뚝 일어서게 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도 덩달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아니 상호작용이었다 할까, 더불어 같이 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텃밭 농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많은 아이들의 의식도, 위계질서에도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난다.
은따였던 아이가 짱에게 지시를 내리는 거나 짱이 그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는 것도 놀랍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였던 대풍이와 민석이가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 것이 특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203쪽)
그건 내가 살아나니 더불어 우리도 살아나게 되는 상승작용이었다. 공부에 치어 늘 열패감에 젖어있던 아이들이 일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고, 자신의 노동이 탐스런 결실로 이어짐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으며 또 수확을 이웃과 나누는 기쁨도 누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잊고 있던 아니 상실했던 자존감이 되살아나게 되었고.
이렇게 우리를 일으키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눈빛, 인정해주는 소소한 말 몇 마디였다 하겠다. 마음 맞는 이들과 더불어 서로를 인정해주는, 그런 일에 나설 때 우린 비로소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