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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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쿠루는 마치 작가 하루키의 분신 같습니다. 그의 전작들이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안쓰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니 작가의 심경이 주인공에게로 옮겨 들어가 오롯이 그가 되고 만 듯합니다. 그의 취향이, 정서적․심리적 기질이 고스란히 쓰쿠루에게 투영되어 있는 게 읽히니까요. 그런 쓰쿠루, 아니 하루키가 넌짓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당신도 과거에 짓눌린 응어리가 있냐고, 그럼 이제 순례의 길로 나서라고 말입니다. 읽는 동안 “르 말 뒤 페이”가 은은히 흐르는 가운데 외롭고 높고 쓸쓸한 핀란드의 풍경이 그려지며 마음결 한없이 잔잔해졌습니다.

 

쓰쿠루의 삶은 갈피를 잡기 힘들게 얽히고설킨 와중에 금방이라도 끊어질듯 간신히 이어지고 있어 읽는 내내 마음 졸였다 할까요? 그의 방황은 오로지 시로에게 이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완벽한 케미스트리를 보이던 멤버들 모두에게 동일한 애착과 결속력을 느낀다고 생각했던 쓰쿠루는 그 가운데 유독 시로에게 향한 마음이 각별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꿈에 등장하는 여자, 구로와 시로 가운데 언제나 몽정 상대는 시로 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늘 시로가 연주하던 피아노 선율의 여운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으니. 그러나 현실에선 닿을 수 없는 지점에 있는 시로이기에 하이다가 대신 그의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하이다에게 끌린 것도“르 말 뒤 페이”를 좋아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시로의 그림자가 어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쓰쿠루에게 따스한 온기를 건네준 하이다가 없었다면 삶의 불꽃은 진작 사위어버렸을 것입니다. 하이다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버티다 그마저 사라진 혼돈의 공간에 이제 사라의 부드러운 손길이 다시 그를 감싸게 됩니다. 사라의 권고로 시로에게, 아니 과거의 자신에게로 나아갈 용기를 얻은 쓰쿠루는 이제 시로를 아련히 보내고 시로가 왜, 무엇 때문에 아파했는지 그토록 자신을 지목하여 배제하려고 했는지 알아내려고 핀란드로 향하게 됩니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지경으로 나아가려고 말입니다.

 

늘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하다

 

몸의 한 부분, 아니 한 몸 같던 친구들에게 단호하게 거부당했을 때, 일방적인 절교 선언을 들었을 때 다자키 쓰쿠루는 어땠을까요? 공동체라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자 전부였는데 그것이 일순간 무너져버렸으니 그 허탈감을 무엇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정신적으로 가장 강인하고 균형을 이룬 듯 보였던 다자키 쓰쿠루가 실은 가장 크게 무너지고 말았지요. 그런데 다시 생을 이어가고, 이제 16년 전 자신에게 닥친 사건에 대해, 그 일의 응어리로 꽉 막힌 내면을 뚫기 위해 순례의 길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자키를 일으킨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의 온기였습니다. 옆을 지켜주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기꺼이 말해주던 따스한 이들 때문이었습니다.

 

몸의 중심 가까이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동토의 중심부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것이 가슴의 통증과 숨 막힘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태 그는 몰랐다.(…) 그 차가운 중심부를 녹이기 위해선 다른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388)

 

먼저 다가온 이는 하이다였습니다. 연하의 총명한 친구, 순수하고 원리적이며 쓰쿠루의 내면을 꿰뚫어보던 그는 쓰쿠루의 몽정을 시로를 대신하여 받아들이기도 했지요. 그는“르 말 뒤 페이” 음반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로가 애틋하게 연주하던 그 곡 말입니다. 시로와 하이다는 “순례의 해”로 연결되어 있다 할까요. 쓰쿠루에게 하이다는 곁에 없는 시로의 대역이었던 셈입니다, 쓰쿠루는 하이다를 통해 시로에게 이르려 했던 것이지요.

 

하이다가 사라진 다음 이번엔 사라의 온기가 쓰쿠루의 차디찬 가슴을 슬몃 덮습니다. 사라의 따스하고 진정어린 권고로 자신을 짓누르던 강박에서 벗어나고자 다자키는 순례의 길로 나서게 됩니다. 쓰쿠루의 내면에 아직 소화되지 않은 채 걸려 있는 그 무엇이 그들 사이 자연스런 흐름을 가로막고 있다며 이제 풀어내야 되지 않겠냐고 권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주선으로 쓰쿠루는 우선 그들의 추억이 어려 있는 나고야로 향합니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은 젊은 날 빛을 뿜던 눈부심 대신 다들 흐려가는 눈빛이었습니다. 더구나 시로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요.

 

구로의 절절한 고백을 듣다.

 

그리고 오른 핀란드 여행길에서 쓰쿠루는 의외의 상황에 직면하고 맙니다. 16년 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구로, 아니 에리를 만난 것입니다. 거기서 에리는 쓰쿠루를 사랑했었다고 절절하게 고백하며 포옹을 요청합니다. 에리의 넉넉한 가슴과 등 뒤로 감싼 따스한 손길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요. 자신에게는 쓰쿠루가 선망의 대상이었다며 그동안 담아두었던 간곡한 마음을 내보일 때 쓰쿠루의 마음은 눈 녹듯 풀렸을 것입니다. 힐링도 그런 힐링이 없을 테니까요.

 

칼라가 없는 줄 알았던 다자키에게 “넌 다정하고 쿨하고 조용하고, 그때부터 자기 삶의 방식을 가졌어. 그리고 잘 생기기도 했고.”(371)

 

“있지, 쓰쿠루, 한 가지만 잘 기억해 둬. 넌 색채가 없는 게 아냐. 그런 건 이름에 지나지 않아. 물론 우리가 그걸로 너를 자주 놀렸지만, 그건 다 아무 의미도 없는 농담이야. 넌 정말 멋지고 색채가 넘치는 다자키 스쿠루야. 그리고 근사한 역을 만드는 사람이고. 지금은 건강한 서른여섯 살 시민으로 선거권이 있고 세금도 내고 나를 만나러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까지 올 수 있어. 너에게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 너에게 필요한 건 그것뿐이야. 두려움이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놓쳐선 안 돼.”(387)

 

그리고 과거의 일에 대해 구로는 진심을 담아 사죄의 마음을 전합니다. 구로의 마음을 또렷이 읽은 쓰쿠루도 울렁거립니다. 그러더니 그예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원망이 이해로 바뀌고, 더 나아가 그들의 심경에 공감까지 하게 됩니다.

 

쓰쿠루는 말했다. "지금가지 나는 계속 내가 희생자라고만 생각했어. 이유도 없이 가혹한 짓을 당했다고 생각해왔어. 그 때문에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가 내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비틀었다고. 솔직히 말해, 너희 넷을 원망하기도 했어. 왜 나 혼자만 이런 참혹한 꼴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지도 몰라. 나는 희생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동시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 칼날이 나를 벤 건지도 몰라.“(375~376)

 

이제 쓰쿠루는 시로, 과거의 응어리를 벗어나 구로에게 위로를 받고 순례의 길을 마감합니다. 그 회귀점은 출발 원점이었던 사라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순례의 길에 오르라고 격려했던 그녀에게 말입니다. 사라의 승낙을 받기 위해 안달하며, 그녀와 사귀고 있지 싶은 중년 남성에 대한 질투심이 불타오릅니다. 어느새 삶의 의욕이 충만한 자연인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이렇게 쓰쿠루를 회복시킨 힘, 그것은 곁을 지켜주었던 이들이 전해 준 따스한 온기, 또 그 온기에 고무되어 미래로 향해 나아간 순례의 여정, 그리고 시로에게 향해 나아가다 우연히 발견한 구로의 진심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결국 쓰쿠루, 아니 하루키는 더 이상 과거의 굴레에 얽매어 무기력하게 자신을 방치하지 말고 온전한 순례의 길로 오르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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