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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문학작품, 특히 소설에 관한 한 작가나 독자 모두 호흡이 짧은 시대가 되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대하장편 같은 장르는 대중들의 지적 구조나 심정적 성향에 더 이상 맞지 않는다. 이를 반영하듯 요즘 소설은 대개 서사나 구성에 있어서 한 주제를 좁고 깊게 천착하여 개인의 의식 등 미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겠다. [고래]는 이런 트랜드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기 드문 매우 예외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비록 한 권에 담긴 얘기지만 소재, 서사 진행, 구성 등 모든 면에서 긴 호흡을 요하는 그야말로 장편이라 이름 붙이기에 적합한 작품인 것이다. 그것도 어느 한 대목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 없이 한결같이 흡인력을 유지하고 있다. 간만에 제대로 만난 기분이다.
요즘 흔히들 소설 쓰지 마라!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곤 한다. 터무니없는 거짓말 하지 말란 얘기다. 우리의 소설이 근거 없이 꾸며대는 허황된 얘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저속한 이들의 거두절미 단정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들이 얼마나 대중들에게 공감 가는 얘기를 리얼하게 들려주지 못했으면 이런 매도까지 당할까 하고 성찰해봐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감동적인 한 편을 후련하게 읽었다면 이런 게 과연 소설이구나! 하고 절감하며 함부로 비하하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설을 깔보는 이들도 [고래]를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지레짐작해본다. 영양가 없는 엉터리만은 아니구나 하고 단번에 느끼게 될 것이니. 그만큼 소설다운 소설이라 하겠다.
구성이나 서사 면에서 복잡다단하기 이를 데 없는 [고래]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나름의 분류를 하자면 환타지를 가미한 영상소설로 읽힌다. [고래]에는 시점을 자유자재로 이동하거나 죽은 자들이 수시로 등장하여 산 자와 소통하고, 코끼리 같은 동물과 교감하는 등,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환타지적 요소가 다분하다. 또 다양한 공간에 대한 세밀한 묘사, 사건의 리얼한 구성, 생생하고 극적인 서사 전개와 대화 및 장면 전환 등은 드라마나 영화 같은 영상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작가의 시나리오 창작 경험에서 비롯된 듯 영화적인 소재나 기법 자체를 많이 차용하고 있다. 금복이 사랑했던 칼자국이 영화관 기도(경비용역)이었고 벽돌공장에서 부를 축적한 금복이 평대에 고래 모양의 극장을 지었다거나, [포레스트 검프]의 깃털 날리는 아이디어를 차용한 듯 수시로 이야기 연결 고리로 등장하는 바람결이라든지, 춘희가 코끼리 점보의 등을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를 떠올리게 한다.
[고래]는 영웅들의 장려한 기록을 담은 설화이다. 그 영웅은 천하장사 걱정, 희대의 건달 칼자국, 페로몬 향으로 범벅이 된 금복, 붉은 벽돌의 여왕 춘희 뿐 아니라 이름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허다한 이들로 등장한다. 그들이 펼치는 활극 같은 시원시원한 얘기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런 영웅들의 얘기가 뜬금없고 허황하게 들리지 않는다. 왠지 살갑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것 같은 정겨움까지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네 삶의 축소판을 리얼하게 포착하여 치밀하게 재현한 작가의 역량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영웅 설화에 살을 입히고 피가 돌게 만든다. 하여 이 허구의 얘기를 감동적이리만치 순정하고 치열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고래]를 완독하고 나면 그동안 좀처럼 누리지 못했던 특이한 만족감에 뿌듯해질 것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함부로 말해왔던 소설의 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이제 신중해질 것이다. 이런 묘미가 있구나! 하는 경탄이 나올 것이다. 하여 [고래]는 소설의 권위를 다시금 깨닫게 한 기념비적 작품이라 하겠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 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