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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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땐 솔직히 약간의 거리낌이 있었다. 노벨상 수상자의 소설 및 소설가론이어서 관심은 많이 갔지만 이슬람 문화권인 터키 출신이고 수상 이후에 겨우 알려진 작가여서 그의 정신세계가 어떨지 독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위압적이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권에 대한 선입견 탓인지 모르겠지만 권위적인 제스처로 군림하듯, 혹은 한 수 높은 고수가 하수를 계몽하듯 얘기를 풀어나가는 게 아닐까 해서다.

 

하지만 몇 장을 넘기지 않아서 그건 정말 공연한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무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같이 살가운 말투로 정겹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때론 수줍게 심경을 고백하기까지 하면서.

 

오르한 파묵은 우선 소설이 무엇이고 그 묘미는 어떤 데 있는지 생생하게 알려준 다음 마치 대학 문창과 수업 교육과정을 설계하듯 자신의 강의 계획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소설론을 들어보면 일반적인 얘기와 무척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성과 감성을 아우르는 새로운 지경으로서 소설을 얘기하고 있다.

 

논리와 상상력, 이성과 몸이 서로 충돌하는 중심부가 하나뿐인 데카르트주의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설은 서로 모순되는 사고들을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고, 동시에 이해하게 만드는 특별한 구조입니다.(39쪽)

 

자기 책에서 자기가 만든 캐릭터에 자기도 모르게 전파했던 감각적인 경험들에 대해 얘기하며 우리의 경계심을 허문다. 자연스레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소설 이론이 실재로부터 상상의 독립성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어떤 독자가 나의 소설에서,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만든’ 나의 진짜 삶의 경험을 감지했다고 말하면, 나는 내 영혼에 대한 은밀한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그 고백을 다른 사람들이 읽기라고 한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55쪽)

 

그는 또 소설의 묘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어떤 소설론보다 리얼했다 할까.

 

소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모두, 가장 소박한 작가에서 가장 성찰적인 독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설을 쓰거나 읽는 사람이라면 모두, 마음 한 구석에서 소설이란 이 아찔하고 모호한 느낌 때문에 읽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57)

 

이렇게 청중, 책에선 독자들과 래포를 형성한 다음 파묵은 먼저 작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다 소설 캐릭터로, 이야기의 구조로, 허구에 대한 개념으로, 소설 속 시간에 대한 문제로, 사물로, 관점으로, 박물관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의 발걸음을 따르다보니 어쩜 한 편의 작품을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초보적인 습작 수준이 나오겠지만 말이다.

 

하여 파묵의 이 책은 소설처럼 한번 훅~ 통독하고 말 게 아니다. 문예창작, 혹은 소설 감상 텍스트처럼 깊게, 두고두고 읽어야 할 듯하다. 살갑게 다가오는 그의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눈이 부쩍 높아질 것 같다. 스킬도 많이 향상될 듯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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