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와의 대화 이슈북 1
함세웅.손석춘 지음 / 알마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껍데기는 가라]는 무척 얇다. 이슈북 시리즈가 독자 일반의 관심과 역량을 감안하고 배려하여 발간된 것이기 때문이다. 시사적으로 민감한 이슈의 토대가 되는 인문적 배경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풀이하고, 읽는 호흡도 고려하여 쉽고 짧게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책을 잡았을 땐 금방 독파할 수 있겠다 싶어 만만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게 아닌가. 평소 관심이 많던 분야이고 딱히 어려운 대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읽히지 않았던 것이다. 의아했지만 무슨 까닭인지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퍼뜩 짚이는 게 있었다. 마음결을 곰곰 가다듬다보니 몇 갈래 꼬인 가운데서 자그마한 실마리가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우선 분노 때문인 것 같았다. 읽다보니 자연스레 감정 이입이, 그것도 과잉 개입이 이루어져 처참한 현실에 개탄하다 끝내는 분노심으로 들끓게 되었던 것이다. 손석춘 님이 마당을 잘 마련해서였는지 신부님은 거침없이 얘기를 풀어나갔는데 군데군데 나의 자아가 끼어들게끔 울컥하게 만드는 것 투성이였다. 그렇게 거북한 마음으로 어찌 가뿐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겠는가. 분노는 몇 군데 대목에서 특히 솟구쳤는데 신부님의 인생 역정을 정리한 부분에서는 눈이 번쩍했다. 신부님은 젊을 땐 영혼의 정의를, 장년기엔 정치의 정의를 위해 애쓰다 이제는 경제 정의를 위해 나서고 있다 했는데 이는 정치에 관한 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리라. 그 부분을 읽다 현실 정치의 일그러진 모습이 오버랩되며 이건 신부님이 한참 싸우던 유신 독재 시절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던 것이다. 거기서 답답하게 꽉 막혀버려 더 읽어나갈 수 없었다. 이 시대에 정치적 민주화는 당연히 돌이킬 수 없는 대세여야 하는데 작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참혹했던 시대에 대한 향수 정도가 아니라 본격 미화 작업이 시도되고 있고, 더구나 그 정신을 고스란히 계승하겠다는 이가 대선 가도의 선두주자로 나서는 등 수구적인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는 실정인데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또 하나 경제 민주화에 역행하는 맘몬의 세력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망연자실. 경제 권력이 얼마나 우리 삶을 교묘하고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한 신부님의 전언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모든 국민이 그들 조직의 부품으로,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게끔 말이다.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경제민주화의 개념조차 모르는 유신 미화 계승 세력이 이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나선 코미디 같은 일이다. 한때 경제민주화 주장을 빨갱이 짓이라고 매도하던, 집권하면 더욱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할 정책을 쓸 게 불 보듯 뻔한 이들이 집권을 위해 본색을 숨기고, 아니 그게 이율배반인지도 모르고 경제 민주화란 이름을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를 넘어 더 멈칫거리게 만든 건 나에 대한 자의식이었다. 이는 정말 심각하게 나의 내면을 뒤흔들었는데 책을 읽어나갈수록 신부님이 말하고 있는 껍데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이 또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껍데기의 횡포를 수수방관, 묵인하고 불고지한 주범이 나였다는 찔림이 밀려와 책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김용철 변호사가 비자금 의혹을 그렇게 명확하게 제시했는데도, 그 역시 삼성의 마름이었는데 이익 다툼 과정에서 뭐 뒤틀린 것이라도 있담! 하며 냉담하게 여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능히 그러고도 남을 줄 알면서도 삼성 제품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는 자각도 밀려왔다. 박근혜 지지 세력이 안철수, 문재인 등 속칭 민주 세력에 대해 딴지를 걸 때도 상대방에게 그런 빌미를 제공하지 말았어야지 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탓했던 일도 떠올랐다. 그리고 신부님이 지적한 것처럼 물질의 노예, 맘몬의 숭배자가 되어 맹목적으로 황금만능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순간 어쩜 방조 및 불고지죄 정도를 넘어 껍데기 자체로 살아온 것이었구나 하고 자탄했을 밖에. 신부님은 껍데기를 비판하려거든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했는데 말이다. “정의를 말하려거든 너부터 정의로워라.”는 신부님의 전언이 이처럼 따갑게 느껴질 수가. 이러니 책이 제대로 읽힐 리가 있었겠는가?


마냥 가라앉아 있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이런 껍데기의 시대에 도움이 될 만한 작은 일이라도 뭐 없을까 헤아려 보았다. 잘 찾아보면 실천의 여지도 있을 듯했다. 퍼뜩 떠오른 게 맘몬 숭배에 급급한 나의 마음부터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신부님이 언급한 악마의 하수인이어서는, 재물 앞에, 황금 앞에 무릎을 꿇는 노예여서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가급적 베풀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조용히 베풀고 소비생활은 줄여 나가야지 하고 각오를 다졌다. 정치-경제 지배 커넥션에 대해서는 고요히 심판할 생각이다. 그들의 분열적 면모를 친구들에게도 알려 심판 대열에 합류시키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선거라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효용을 아직은 기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더 나아가 민주 진영 내에서도 과거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향을 이념으로, 정책으로 제시하고 추진할 의지와 역량을 갖춘 이들이 나올 수 있도록 선거로, 댓글로 또 독자 투고 등을 통해 의견을 개진할 생각이다. 너무 미미해 보이는 이런 실천들이 단번에 큰 변화를 이뤄내지는 못하겠지만 공감하는 이들이 조금씩 모인다면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총합은 어떤 선각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 추슬러야겠다.


하여 잘 읽히지 않는 이 얇은 책을 겨우겨우 읽는 가운데 나의 실상을 또렷이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상에 치여 지지부진하고 있던 내 삶을 자가 점검한 셈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내 삶의 지향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살짝 결기를 세워 나름대로 단호하게 나가야 하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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