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1.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 옆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는 빙긋이 웃는다 /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 외로워지는 연습 / 술집을 빠져나와 /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최일남의 [국화 옆에서]는 조문기이다. 하루에 두 군데나 겹치기로 장례식장을 들르며 겪은, 얘기 나눈 기록이다. 한 군데선 상처한 전 직장동료와 일본 영화와 소설에 대한 식견을 과시하며 장례문화에 대한 지적 대결을 펼치더니 다른 곳에선 친구보다 자신을 더 살갑게 대해주던 친구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각별한 맘으로 울적해하다 결국 어린 시절 그 천진무구하던 기억을 떠올리곤 울음 대신 환해지는 과정을 파노라마로 그리고 있다. 어쩜 경륜 짧은 이들은 다다를 수 없는 혜안으로 생과 사의 비의를 보여주는 것 같아 약간의 이질감도 들었지만 조금 생각하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달까? 가벼운 환희로 타인과 죽음이라는 방식의 이별을 치르고 자신의 죽음도 담담히 기다리려는 마음의 결을 알 것 같고 나도 그럴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2. 쓰달픈 생의 조각들

 

권지예의 [퍼즐]과 이명랑의 [제삿날]은 신산한 삶의 쓰달픈 구석을 그리고 있다. 권지예의 글은 남편에게 늘 구박만 받다 결국 퍼즐의 마지막 조각으로 자신이 투신한 마당 우물 뚜껑을 택한 죽음의 기록이다. 이명랑은 파란 많은 생의 역정을 공유했던 두 과부들의 교통사고를 두고 자식과 며느리, 사고 당사자들이 각각 그들 나름의 관점에서 살핀 엇갈리는 얘기이다. 둘 다 생의 어둔 그늘, 쓰디쓴 대목을 다루고 있지만, 더구나 그중 하나는 삶을 마감하는 얘기를 그리고 있지만 이야기의 색조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비애와 외로움이 흐르는 바탕색에 퍼즐과 동반자라는 색을 입히고 간을 맞춰 생이 터무니없이 슬프고 허무한 것만은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이런 유의 구성은 다른 작품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소금창고]와 [파종]에서는 이제 퇴물이 된 협궤열차와 은퇴한 아버지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는 것들이 마냥 아프기만 한 게 아니란 걸 잔잔한 옴니버스로 엮어 보이고 있다.

 

3. 소량의 비애와 외로움으로 간을 맞춘 생의 환희

 

김연수의 [깊은 밤, 기린의 말]은 생명의 기록이다. 삶의 신비스런 이야기다. 전반적 발달장애로 세상과 담을 쌓은 태호와 가족들의 때론 알콩달콩한 더러는 섬뜩한 썸씽이다. 썸씽이란 뜻은 태호를 향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가 중의적이란 뜻이다. 태호의 발달장애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자며 행동 지침까지 적어서 가족들에게 공지하고선 자신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아빠의 조급함과 이중성, 태호를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고 치료에 매진하면서도 울컥하여 태호를 싣고 한강변 도로를 달리다 중앙선을 넘어 삶을 마감하려 마음먹기까지 했던 엄마의 극단적 행동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와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인다. 쌍둥이 누나들은 태호를 한결 같이 사랑한다. 결코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태호와 여러 가지 시험도 하고 더불어 일을 도모하기까지 한다. 그런 태호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된다. 모든 일에 마음 문을 닿고 살던 태호가 유일하게 몰티즈 강아지에겐 맘을 열더니 그 강아지가 장님이란 걸 안 아빠가 애견 숍으로 돌려보내 버리자 누나들과 강아지를 찾으러 야밤에 나선 것이다. 기어이 기린을 찾고 마냥 좋아하는 태호는 진정 살아있는 아이였다. 그리고 여린 것들과 이어지고자 하는 생의 의지로 충만한 아이였다.

 

하여 이 작품집은 낱낱이 동떨어진 얘기가 아닌 듯하다. 대가들의 완성도 높은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을 병렬로 묶은 것만은 아니란 얘기다. 하나로 꿸 수 있는 것들이니 장편소설 한 편으로 읽어도 무방하게 보인다. 그것은 아름다운 삶, 환하게 밝아지는 생의 기록이다. 신예 김연수로부터 노장 최일남에 이르는, 어린 아이의 삶에서 죽음에 이른 노년의 쓸쓸함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생의 환희를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게 너무 밋밋할까 싶어서였든지 소량의 비애와 약간의 외로움으로 더러 간을 맞춰 얘기의 맛을 한층 리드미컬하게 고조시켰다 할까? 눈물 그렁하게 움츠리고 있다 어느새 환하게 밝아지는 모습을 파노라마로 이어붙인 아름다운 얘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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